동문 CEO - OBS 윤정식 사장을 만나다 / 정치외교학과 76학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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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이 발달하고 새로운 미디어 서비스가 등장하며 우리나라 방송환경은 눈부시게 발전해 왔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전까지는 존재하지 않았던 SNS의 등장과 온라인 저널리즘의 세력 확장으로 기존 매스미디어의 입지는 점차 좁아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천과 수도권을 기반으로 한 지역 지상파 방송사인 OBS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지난 2007년 개국이래 색다른 방송 콘텐츠를 선보이며 새로운 시도를 거듭했다. 하지만 법적인 제약으로 인천 외 지역의 ‘역외 재전송’이 불가능해 충분한 시청자를 확보하지 못한 채 시도한, 순서가 맞지 않는 이른 도전이었다. 그 후 OBS는 경영상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상황은 윤정식 사장이 취임한 지난해 7월 까지도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 76학번 동문이기도 한 윤정식 사장은 취임 직후 OBS의 경영 정상화를 목표로 세웠다. 방송기자로서 오랜 경력과 경영자로서 쌓아온 경험들이 십분 발휘됐다. 반년 남짓의 짧은 시간 그가 이뤄낸 성과는 놀라웠다. 만성적인 경영난에 시달리던 OBS를 창사 이래 처음으로 흑자로 돌아서게 만든 것이다.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2016년 OBS의 출발은 그 어느 때보다 활기차다. 과거와 달리 여건도 나쁘지 않다. 법적인 제약이 해결되며 서울과 경기 권까지 약 2,600만명의 시청자를 확보한 상황이다. 이런저런 사항들을 챙기느라 인터뷰 중에도 수시로 업무를 봐야 하는 윤정식 사장의 표정에는 자신감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이 엿보였다. 그가 이야기하는 학창시절, 그리고 젊은 날의 에피소드 속에는 ‘노력’이라는 두 글자가 각인돼 있었다. 그러면서도 저성장과 취업난이라는 어려운 상황에서 꿈을 이뤄가고 있는 국민대학교 후배들을 이야기할 때면 안타까움을 털어놓기도 했다. Q OBS는 지난 2007년 개국이래 지역 지상파 방송국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헤쳐나오며 기반을 다져왔다고 알고 있습니다. 지난 2015년 7월 취임 후 굉장히 바쁘셨을 듯 한데요. 취임 당시 어떤 목표를 세우셨는지 궁금합니다. OBS가 지상파 방송사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만들어야겠다는 것을 목표로 세웠죠. 최근까지 OBS는 원칙이 없었다고 생각해요. 경기도와 인천을 근거로 하는 방송사로 허가를 받았는데 시작부터 전국 방송, 즉 중앙방송의 방식으로 운영이 된 거죠. 이미 몇 십 년의 역사를 가진 다른 지상파 방송사를 따라잡기란 쉽지 않거든요. 게다가 역외 재전송 규제가 있는 상황에서 방송 콘텐츠만 의욕적으로 많은 제작비를 들여 만들기도 했고요. 그 모든 게 누적이 돼서 어려움으로 이어졌던 거죠. 이러한 상황에서 제가 사장으로 취임해 할 일은 우선 ‘경영 정상화’ 였어요. 그 이후에 올바른 방송 콘텐츠, 좋은 방송 콘텐츠를 만들어서 인천은 물론 경기, 서울 지역 2,600만명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인지도를 높여야 된다는 생각을 했죠.
지난해 말 OBS는 창사이래 처음으로 흑자를 기록했습니다. 그걸 기반으로 해서 올해는 경영을 호전시키고 수익도 늘려서, 좋은 방송 콘텐츠에 투자할 만한 여력을 키울 예정입니다. 그래야만 정상적인 지상파 방송사로서 역할과 기능을 할 수 있거든요. 만만치 않은 목표지만, 그것의 50%를 이뤄도 목표 없이 운영 됐던 기존의 OBS보다는 훨씬 나아질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그 이상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죠. Q 충암고등학교를 졸업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고교시절 사장님께서는 어떤 학생이셨는지, 또 어떤 꿈을 키우셨는지 궁금합니다. 충암고가 바둑으로 유명했거든요. 저 역시 바둑을 좋아하고 야구도 좋아했죠. 그 시절은 다른 친구들처럼 천방지축으로 돌아 다녔어요(웃음).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나는 좀 특별한 일을 할 것 같다’는 막연한 예감은 했어요. 부모님의 가르침 덕분에 책을 많이 본 편이었고 영화나 연극을 통해 다양한 문화를 접하는 걸 좋아했죠. 아버님 회사에 가서 아르바이트도 해보고요. 특히 방학 때는 어린 나이에도 ‘내가 할 수 있는 한계 내에서는 다양한 경험을 해보자’는 생각에 일단 부딪혀보며 살았던 것 같아요.
Q 부모님 말씀을 하셨는데, 기억에 남는 가르침이 있으셨나요? 부모님께는 정말 고마운 것이 있어요.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무렵에 한글 전용운동이 시작됐어요. 하지만 아버님은 우리나라 언어는 한자를 모르고는 안 된다고 하시면서 당시 일간지 사회면을 모두 뒤져서 한자가 나오면 훈음을 다는 훈련을 시키셨죠. 1주일에 신문을 나오는 날이 6일이었는데 그 나이에는 꽤 많은 양이었어요. 어린 마음에 너무 하기 싫어 한번 정도는 게으름을 피우기도 했죠. 그때는 그렇게 싫었는데, 지금에 와서 저는 우리 세대 중에서도 한문을 굉장히 많이 아는 사람이 됐어요. 제가 어린 시절에 부모님께서 엄격하신 덕분이었죠. 그것이 참 중요한 것 같아요. 부모가 엄격하면 그 엄격함을 따라서 자식은 맞추려고 노력하거든요. 당장은 힘들고 어렵겠지만, 나중에 보면 정말 옳은 일이 되니까요. 한편으로 우리 아버지께서도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들어요. 어린 아들이 힘들어 하는데 시키는 게 쉽진 않거든요(웃음). 그래서 전 지금도 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말씀 드려요. 어떻게든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 하셨고, 책 읽는 습관도 키워주셨죠. 굉장히 좋은 교육이 됐다고 생각해요. Q 국민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선택한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방금 말씀 드렸듯, 그 역시도 아버님께서 시키신 신문 한자 훈음 달기 연습이 적잖이 영향을 줬다고 생각해요. 어릴 때부터 매일 빼놓지 않고 신문을 읽다 보니 법이나 행정, 정치에 대해서 일찍부터 관심이 많아졌거든요. 재수를 하면서도 저는 계속 정치, 행정 분야의 학과로 지원을 했어요. 그만큼 사회학에 관심이 높았죠. 어떤 사회적 현상이 나타나면 분석 하는 것을 좋아했고, 그때는 나름 특별한 해석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고요(웃음). Q 사장님께서 학교를 다니실 당시와 지금의 국민대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기억나시는 학교의 특별한 공간은 어디인지 궁금합니다. 제가 학교를 다닐 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상전벽해라고 표현할 수 있어요. 총장님께서 계시는 본관은 그때도 있었어요. 그리고 신관이라고 했는데, 지금은 2호관이라고 하던가요? 그 뒤의 도서관도 기억이 나요. 특히 신관 뒤에 막사 형태로 ‘미네르바’라는 커피숍이 있었는데, 거의 매일 그곳을 들렀죠. 가장 기억에 남는 공간은 역시 도서관이에요. 집이 학교와 가까워 매일 새벽 6시면 도서관에 가 친구들 자리도 맡아 놓고 공부를 했거든요. 정말 지금의 제 뿌리를 키워 준 장소가 도서관인 듯 싶어요.
1976년 학교에 입학한 새내기 시절에 정외과 축구팀에 들어가 10월 축제 축구대회에 참가했던 것이 생각나요. 그때 제가 골키퍼를 했는데 방어율이 꽤 높았어요. 문제는 결승에서 다이빙 캐치를 하다가 골대에 얼굴을 심하게 부딪혔다는 거죠. 그래서 앞니가 부러졌는데, 정외과 선배들이 돈을 모아서 치료해줬죠. 지금 제 앞니가 그때 치료받은 겁니다(웃음). 그 후에 군대에 다녀와서 복학 후 3학년 무렵에 다시 과 대항 축구대회가 있었는데, 그때는 제가 나름 리더십을 발휘했던 것이 기억나요. 결승전에서 상대팀과 전 후반 동점으로 연장전을 치렀는데, 전반전에 2골을 먹고 말았어요. 후반전이 시작되기 전 팀원들을 모아 놓고 “이건 아마추어 경기다. 우리가 여기서 포기하면 끝난다. 하지만 상대팀도 지쳤으니 마지막 10분은 죽을 힘을 내보자”고 했죠.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한 이야기가 힘이 됐는지, 기적적으로 연장전 후반 10분에 내리 3골을 넣으며 우리 과가 역전 우승을 하게 됐어요. 그때가 참 기억에 남죠. Q 학과 내에서도 전공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그 중에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을 텐데요? 3학년 때 제가 기획하고 연출해서 최초로 진행했던 ‘모의 유엔총회’가 생각나네요. 1981년이었는데, 그 전까지는 이렇다 할 학과 이벤트가 없었죠. 당시 강당이 101호와 102호 강당 2곳이었는데, 법학과의 ‘모의재판’이 인기가 좋았어요. 마침 101호 강당이 법학과 모의재판 할 때 비어있다는 걸 알고는 같은 날 모의 유엔총회를 하기로 했죠. 한달 이상 합숙을 하며 인사말은 영어로 하고 프랑스 대표는 불어로, 일본 대표는 일본어로 연습을 시키며 준비했던 거라 꽤 그럴 듯했죠. 그런데 놀라운 것이 법학과의 모의재판을 보러 간 학생들까지 저희 쪽으로 몰리며 대박을 쳤다는 겁니다. 처음에는 좌석의 3분의 1 정도 차있더니 끝날 무렵에는 자리가 없을 정도였죠. 그 후로 모의 유엔총회는 5년 정도 이어졌다고 알고 있어요. 중단 된 것이 안타까운데, 지금 정치외교학과 학생들도 한 번 해 볼만한 행사가 아닐까 싶네요.
그때 역시 지금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취직 걱정이 컸어요. 물론 지금보다 취업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죠. 대기업 등 욕심을 내볼만할 여건이 됐고, 경쟁도 지금보다 치열하지 않아 열심히 하면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거든요. 하지만 제 경우는 좀 달랐어요. 당시 우리학교 학생들이 많이 도전하지 않았던 언론사에 도전 했거든요. 대학교 4학년 1학기인 3월부터 언론사 시험을 계속 봤어요. 한국일보, 중앙일보와 같은 신문사부터 KBS, MBC 등 방송사도 지원을 했죠. 결국 마지막에 춘천 MBC에 합격을 했어요. 언론사 기자는 당시 제 간절한 희망이었는데 가까스로 이뤄낸 거죠. 당시 학생들은 보통 8월이면 대부분 취직이 됐고 제 경우 졸업준비위원회 활동도 한데다가 성적도 좋았기 때문에 더 빨리 취직할 수 있었어요. 오죽하면 학과장님께서 “왜 굳이 언론사를 고집하냐”고 하실 정도였죠. 그래도 끝까지 언론사 시험을 봤어요. 결국은 응원해 주시고, 동기들도 할 수 있다고 응원해 줬죠. 그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거기서 많은 용기를 얻었거든요. Q 방송 기자 생활을 하시다가 미국 휴스턴 대학원으로 유학을 떠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당시 이야기를 들려 주신다면 ? 처음 춘천 MBC 기자로 시작했지만, 목표는 서울의 MBC 본사였어요.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각 지방 MBC는 독립법인이라 서울 MBC로 올 수는 없었죠. 방법도 모르고 끌어줄 인맥도 없는 상황이었지만 포기 할 순 없었어요.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서울 MBC로 갈 수 있을까”를 궁리했죠. 결국은 실력이었어요. 실력 있는 기자라면 스카우트를 할 거라고 예상했죠. 춘천 MBC에 있으면서도 전국에 방송될 만한 기사거리를 찾아 발로 뛰었어요. 그리고 당시 ‘MBC 가이드’라는 잡지에 취재 후기나 기고를 하면서 서울 MBC에 제 인지도를 높이는 노력을 했죠(웃음). 또 영어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했어요. 어떻게든 남들과는 다른 실력을 확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죠. 결국은 미국 대학원에 갈 수 있는 수준을 달성해서 서울언론재단의 해외 연수 프로그램에 지원을 했어요. 석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는 2년 과정이었는데, 당시에는 그 프로그램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기자가 별로 없었어요. 제가 살펴보니 충분히 가능하겠다 싶어서 도전을 했죠. 당시 심사를 하시는 분들이 언론계에 명성이 자자한 분들이었는데, 처음에는 제가 지방 방송사 출신 기자라는 것을 썩 반기지 않았어요. 하지만 준비한 학업계획서와 영어성적을 보고는 눈빛이 달라지더군요. “이미 어드미션까지 받아놨으니 지원만 해주시면 된다”고 하니 바로 통과시켜 주시더군요. 그렇게 휴스턴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어요. 결국 과정을 마칠 때쯤 서울 MBC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요. 그렇게 1989년에 춘천 MBC에 양해를 구하고 퇴사한 뒤 서울 MBC에 경력기자로 입사를 했어요. 저 이후로 지방 MBC 출신들이 서울 MBC에 경력기자로 입사하는 사례가 많아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선례가 됐다는 점에서 자부심이 있죠.
1990년대는 대단했죠. 신행주대교 붕괴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 위도 유람선 침몰사고, 목포 공항 아시아나 항공기 추락사고, 부산 구포 열차사고, 동해안 잠수정 침투사건, 대구 지하철 가스폭발사고… 당장 생각나는 것만 해도 이 정도네요. 그 모든 대형 사건사고 현장에는 중계차와 함께 제가 있었죠. 삼풍백화점 붕괴사고 때도 생각나네요. 그때는 제가 원고 하나 없이 장장 3시간을 생방송으로 현장 중계를 하기도 했죠. 그런 사고가 나면 2~3일 잠 못 자는 건 일도 아니었어요. 그 외에 특별히 기억에 남는 특종은 ‘부천세무비리사건’이죠. 당시는 컴퓨터가 보편화되기 전이라 구청 세무공무원들이 세금을 받으면 복사지를 긁어서 영수증을 민원인에게 줘요. 또 다른 한 장은 구청에서 보관하고 나머지 한 장은 은행으로 보내야 했죠. 그런데 당시 공무원들이 그 돈을 자기 호주머니로 넣었다는 게 문제였어요. 그때는 많고 적고의 차이지 지방세무과에서 비일비재한 비리였어요. 그걸 부천 소사구청에서 제가 단독으로 취재해 전국적인 특종을 했죠. 한달 이상 전국 지방세과를 대상으로 감사가 이뤄졌고 비리는 완전히 단절 됐어요. 물론 컴퓨터가 보급되고 난 이후에는 불가능한 비리가 됐죠. Q 지금도 OBS에 계시면서 취재에 나선 젊은 기자들을 보면 옛 기억이 떠오르실 듯 합니다. 보도국에 애착이 크실 듯 한데요? 당연하죠. 하지만 예전만큼 투지가 안 보인다는 안타까움은 있어요. 제가 MBC에 있을 때도 기자들 면접시험을 보면 정형화된 스타일의 기자들이 많이 들어와요. 고등학교는 외고나 과학고, 대학은 서울, 연•고대죠. 사실 국민대학교 출신이 없다는 게 안타깝기도 해요. 면접을 볼 때는 출신학교 란을 가리고 뽑는데도 합격자를 보면 없어요. 어쨌든 거의 판에 박은 듯한 기자들이 배출되면서 예전처럼 돌출행동을 하는, 혹은 기자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요. 물론 사회 분위기도 예전처럼 기자라고 해서 대접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자라면 때론 돌출행동이 필요하거든요. 제가 말하는 돌출행동은 행동 자체가 창조력이 뛰어난 게 아니라 행동의 근거가 되는 돌출적인 사고방식이 있어야 한다는 거예요. 제가 있던 시절 카메라출동, 시사매거진 2580에서 창조력을 최대한 발휘한 취재, 기억에 남는 특종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걸 보기 힘들다는 게 안타깝죠. Q 아무래도 미디어환경의 변화도 영향이 있을 듯 한데요. iMBC 총괄이사를 지내신 2003년부터 KT 미디어허브 이사로 계셨던 최근까지는 경영자로서 우리나라 미디어 환경의 변화를 직접 경험하셨을 듯합니다. 그것은 미디어에 오래 종사한 저 같은 사람의 숙제이자 난제이기도 해요. 앞으로 예측되는 미디어의 발전에 대해 기대가 있어요. 하지만 우려 섞인 기대죠. 이제까지 미디어는 ‘매스미디어’라는 말 그대로 현장에서 일어나는 일을 대중을 연결시켜준다는 중간, 매개체라는 의미였어요. 하지만 최근에는 매스미디어가 개별미디어 즉, SNS와 같은 채널과 뭉쳐져서 보이는 경우가 훨씬 많아요. 미디어 형태의 변화죠. 그 형태의 변화가 기존 대중매체인 신문과 방송의 기능을 상당히 떨어뜨리고 있어요. 예전에는 언론이 어젠다를 만들어서 규정을 지으면 됐는데, 지금은 전문가들 직접 옳다, 그르다를 얘기하는 시대가 됐죠. 아마도 앞으로는 개인이 제작하는 미디어들이 한 군데로 모일 거라 생각해요. 종전의 전통적인 미디어의 기능도 하면서 새로운 것을 가미해서 미디어 역할을 수행하지 않을까 생각해요. 미국 같은 경우는 미디어 자체의 변화가 상당히 빠르게 일어나고 있죠. ‘허핑턴포스트’라던가, ‘버즈피드’가 최근에 급부상하고 있고요. 그렇다고 전통적인 미디어가 없어지진 않을 거에요. 역할과 기능은 유지하겠지만 위축은 되겠죠. 다만 그런 환경에서 어떤 수익 모델을 만들어 가느냐가 관건이라고 생각해요.
Q 대학 시절 극복하기 힘들었던 핸디캡 같은 것이 있으셨는지요? 혹 있으셨다면 어떻게 극복하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끈기가 부족했어요. 그래서 어떤 것에 대해 호기심은 많이 생기지만, 그걸 오래 끌고 가질 못했죠. 공부에도 끈기가 필요했는데, 한 때는 30분이 멀다 하고 자리를 뜨기 일쑤였어요. 하지만 고쳐야겠다고 마음먹었고, 자리를 뜨는 빈도를 줄이려 노력했어요. 나중에는 2시간 연속으로 앉아서 공부할 수 있을 정도가 됐죠. 뭐든 한 번은 실수할 수 있어요. 문제는 그 실수가 반복되는 거죠. 전 실수를 메모하고 절대 반복하지 않으려 노력했어요. 똑 같은 일이 벌어지면 방법을 바꿔 시도하는 식으로 실수를 극복했고, 끈기 없는 단점도 없앴죠. 기자 생활에서도 그 습관은 발휘됐는데, 한 번은 공사장 추락사고 기사를 쓰면서 전화취재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마감에 쫓겨 그대로 뉴스가 나갔어요. 하지만 추락한 사람은 죽지 않았고 큰 오보가 됐죠. 직접 찾아가 사과를 하고 수습을 하면서 전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 이후로는 반복적으로 확인하는 것이 습관이 됐어요. 나중에는 취재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도 확인하는 것이 습관화 되더군요(웃음). Q 사장님께서 대학을 다니셨을 때와 지금의 상황은 여러 가지로 다릅니다. 요즘 학생들을 보실 때 칭찬하고 싶으신 점, 또 조언해 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저도 자녀들이 모두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준비를 하는 과정을 지켜봤어요. 정말 지금하고 그때하고는 천지차이죠. 당시에는 대학생의 비율이 적기도 했고, 어느 대학을 나오더라도 대학생이라는 것 자체가 특권이었으니까요. 물론 경제 역시 성장기라 대졸자면 취직도 잘됐고요. 지금은 그렇지 않잖아요. 젊은 세대의 70~80%가 대학졸업자에다가 경제는 저성장 구조가 됐고 고용인원은 쉽게 늘어나지 않죠. 그 자체가 학생들에게는 상당한 고통이라고 생각해요. 예전보다 더 애쓰고 있는 학생들에게 노력, 정신력을 이야기하는 것은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제 자녀들도 취직을 위해 밤새 공부하고 혼자 원서 제출하러 다니는 걸 보면서도 도와줄 방법이 없더군요. 안타까움이 크죠. 결국은 우리 세대가 할 일은 새로운 산업을 만들고 일자리를 늘려야 하는 건데, 현재는 그런 동력이 부족한 상황이라 생각해요. 제 나름 대로는 젊은 세대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해 줄 수 있는 방송 콘텐츠를 통해 도움이 되고자 해요. Q 방송기자, 혹은 방송 분야에서 일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어떤 준비를 하면 좋을지 선배의 입장에서 실질적인 조언을 해 주신다면? 우선은 외국어 실력이 뛰어나야 해요. 다른 실력이 부족하다고 하더라도 외국어 실력이 탁월하다면 그와 관련된 업무를 맡을 수 있거든요. 정규직이 될 확률도 높아지고요. 또 약간 눈높이를 낮춰서 기회를 확보하는 게 좋아요. 저 역시 춘천 MBC에 입사한 것이 서울 MBC로 오는 첫 번 째 기회였다고 할 수 있어요. 처음에는 지방 방송사 기자였지만, 지금은 서울 MBC 방송기자를 거쳐 임원, 지금의 자리에 이르렀죠. 기회만 잡으면 실력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관리자들은 잘하는 사람을 찾게 돼 있거든요. 물론 이것이 정답은 아니에요.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안타깝지만 노력 하라는 말보다는 힘내라고 말 해주고 싶네요. Q 마지막으로 꿈을 향해 정진하고 있는 후배들에게 격려의 말씀 부탁 합니다. 제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 새기고 다닌 “不飛卽已(불비즉이)나 一飛沖天(일비충천)하고, 不鳴卽已(불명즉이)나 一鳴驚人(일명경인)”이란 글귀가 있어요. “새는 날지 않았으나 일단 날면 높은 하늘에 이를 것이고, 울지 않았으나 일단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다”라는 뜻이죠. 초나라의 장왕이 3년 간 주색잡기를 하며 국정을 소홀히 했는데, 이는 충신과 간신을 구분하기 위한 것으로 3년이 지난 해에 간신을 처단하고 나라를 제대로 경영했다는 고사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장왕의 고사처럼 기회를 노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언제는 기회가 올 때 그것을 잡기 위해서는 최선을 다해 준비를 해야죠. 준비가 된 사람은 기회가 왔을 때 자신의 능력을 보여 줄 수 있어요. 한 번 도전에 실패했다고 낙담하지 않았으면 해요. 제가 그런 경험이 없다면 무책임한 말일 수 있지만, 저 역시 여러 번 도전하고 기회를 준비한 과정을 거쳤기에 드리는 말씀이에요. 물론 각박한 현재의 상황에서는 이런 말 역시도 미안하고, 안타까움이 더 앞섭니다. 그저 어려운 여건에서도 최선을 다하길 바란다는, 응원을 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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