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국민인! 국민인!!
티셔츠에 그려내는 ‘녹색 희망’
▲ 자칭 '무허가 길 위의 화가'. 길거리를 지난는 사람들의
   옷을 캠버스 삼아 환경그림을 그리는 윤호섭 교수.
   ⓒ 전라도닷컴

“뭐 그려줄까?”
허리 한 번 펼 새 없이 그림을 그리면서도 아이들과 눈 맞추고 다정하게 그 질문 던지는 것을 그치지 않는다.
“나뭇잎사귀요” “고래요” “하트요”….
저마다의 대답에 따라 옷 위에 초록빛 나뭇잎들이 돋아나고 고래가 헤엄친다. 붓놀림을 따라가는 아이들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이 진지하다. 이제 아이들은 고래를, 나무 한 그루를, 가슴에 품고 다니게 될 것이다.
지난 10월8일 광주 염주체육관에서 열린 빛고을나눔장터 ‘아름다운 세상’에서 ‘천연물감으로 티셔츠에 환경그림그리기’를 진행한 윤호섭(62·국민대 시각디자인과 교수)씨.
 
“쉬운 것부터 담담하게, 그리고 맹렬하게”
그는 주말마다 서울 인사동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자칭 ‘무허가 길 위의 화가’이다.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의 옷을 캔버스 삼아 환경그림을 그리는 일을 해온 지 4년째.
“몇 년 전 장롱 속에서 잠자고 있던 면티들을 정리해보니 수십 벌이에요. 깜짝 놀랐지요. 무슨 옷을 이렇게 많이 소유하고 있었단 말인가 싶어서. 그 옷들로 할 수 있는 좋은 일이 무얼까 궁리하다 그림을 그려 나눠 줬어요.”
거리로 나서게 된 시초다. 사람들과 편하게 만나고 자연스럽게 환경이란 메시지를 전하는 데는 ‘거리’와 ‘옷’이 딱이었다. 그 때가 2002년. 그로부터 4년간 4∼9월엔 일요일마다 인사동에 나갔다. 교수가 길거리에서 그림을 그린다? 용기가 필요하진 않았을까?

“권위는 내 인생의 금기에요. 그거 아주 바보스런 일이야. 자신을 부자유하게 재미없게 살게 만드는 것이죠.”
돈받고 그림 그려주는 노점상으로,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도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쯤이야 굴하지 않았다. 태풍이 아주 심하게 불었을 때 딱 두 번 빠졌을 뿐 거리에서 그림 그리기는  계속되고 있다. “쉬운 것부터 담담하게, 그리고 맹렬하게 실행해야 한다”는 평소의 소신 그대로.

ⓒ 전라도닷컴

그가 티셔츠에 주로 그리는 것은 돌고래, 황새, 나뭇잎, 도롱뇽, 웃는 별 등등. 그는 “우리 세대의 잘못으로 어린 친구들에게, 다음 세대들에게 황새를, 산양을 보여주지 못할까봐” 걱정하고 미안해 하는 어른이다.
그림 옆에 쓰는 말은 ‘지구사랑’ ‘No Whaling’ ‘Everyday Earthday’ 같은 말들이다.
“사람들이 이 옷을 입고 돌아다니면 가족과 친구들이 보고 길거리 사람들이 보잖아요. 걸어다니는 광고, 움직이는 그림메시지랄까. 좋은 뜻 퍼뜨려주니 내가 고마워 할 일이죠.”
그림 그릴 때 쓰는 물감 역시 송진과 식물 엽록소로 만든 천연·친환경페인트다.
인사동에서 그림 그리면서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사귀었다. 그 인연으로 지난 10월 초엔 홍콩의 거리에서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홍콩에서 그림 그리던 중에 갑자기 비가 쏟아졌어요. 허, 어째야 하나 당황했는데 어디선가 모르는 사람들이 금세 비닐을 들고 와선 그림작업을 마칠 때까지 네 귀퉁이를 들고 서 있어 주는 거에요. 이 일 하면서 그런 뜻밖의 만남, 뜻밖의 감동들을 많이 누리고 있어요.”
그가 환경에 본격적으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991년 세계잼보리대회 엠블렘과 공식포스터를 제작하면서 만난 일본 대학생 미야시다 마사요시군 때문. 친환경적인 생활을 실천하는 그 청년을 통해 환경에 ‘무심’했던 자신의 생활을 돌아볼 수 있었다.
그때부터 그는 한 사람의 의지와 실천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됐다. ‘한사람의 힘’을 믿는 사람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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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쓰레기통”
그가 늘 고민하는 것은 “내 삶이 석유에너지로부터 독립할 수는 없을까” 하는 것. 그래서 될수록 가전제품을 쓰지 않는다. 냉장고도 없앴다. 우리가 흔히 ‘편리하다’고 의심없이 믿는 것들 속엔 ‘맹목성’이 있지 않는가라고 반문하는 그.
“무빙워크 위를 걸어가는 사람이 그냥 맨바닥을 걸어가는 사람을 보며 ‘힘 안 드세요?’ 묻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저는 사람들이 일상적이라고 믿는 소비문화의 흐름에서 벗어나 제 발로 걸어가고 있을 뿐이죠. 누구나 무빙워크에 몸을 실어야 하는 건 아니니까.”
‘가능한 한 아파트 평수를 줄이고, 차는 대중교통수단으로, 옷은 3분의 1로, 음식쓰레기는 0으로, 종이는 반으로…’를 지키며 살려 한다. 당연히 자동차는 소유하지 않았으며 출퇴근때는 자전거를 자주 이용한다. 쓰고 난 종이로 명함 만들기, 캔음료 안 마시기, 종이컵 쓰지 않기 등도 그의 생활수칙.
남들이 보면 ‘사서 고생’으로 보일 수도 있을 일들이 그에겐 기쁨이다. 좋은 차, 좋은 집 그런 소유와 소비의 욕망에서 그는 정말로 자유로울까.
“완전히 무관심해졌달까. 큰 평수 아파트에서 이태리산 대리석 깔고 산다고 해서 내 삶의 무엇이 달라지나. ‘내 손으로 집 지어보는 것’외엔 다른 욕심이 별로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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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역시 버려진 물건으로만 짓고 싶단다. 임무를 끝낸 현수막, 야무진 종이상자, 어묵 꼬치용 나무젓가락 등도 그가 건축자재로 생각하고 매일 모으고 있는 것들이다.
‘버리지 않는다’를 원칙으로 삼은 그의 연구실은 온갖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버려진 종이들을 모아 의자를 만들고 우려낸 티백들도 모아 작품으로 활용한다. 씹고난 껌도 마찬가지다.
웬만하면 그는 물건들에 ‘넌 끝장이야’라는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고 ‘쓸모’를 궁리해 새로운 소임을 준다. “우리가 정말 버려야 할 것은 쓰레기통”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다.
대량생산과 대량소비를 부추기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신상품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며 상품들을 ‘단명’시키려 하지만 그는 버려진 물건들에 다시 숨을 불어넣는다.
학생들에게도 그는 “타(他)에 해롭지 않은 질서가 바로 디자인이다”고 ‘그린디자인’의 개념을 강조한다. 재직하고 있는 국민대학의 학부와 대학원에도 환경관련 디자인 과목을 개설했다.
그에 따르면 “커팅 하나를 다르게 함으로써 ‘나머지’를 줄이고 낭비를 줄이는 것 역시 그린디자인”이다. 불필요하게 세련된 디자인 역시 좋아하지 않는다.
그의 강의는 특별하고 활기차기로 이름나 있다. 서울의 대기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방독면을 쓰고 강의실에 등장하기도 한다.

‘환경’과 ‘나눔’이란 뜻이 있는 곳엔 그가 있다!
그는 어느 단체에 소속되지 않고 개인적으로 활동한다.
이유는 “소속되면 자유가 없어지니까. 자유롭지 않으면 창의적일 수 없으니까.”
그러나 ‘환경’과 ‘나눔’이란 뜻이 있는 곳엔 꼭 나타난다! 몇 개의 붓과 물통, 페인트통, 아이들에게 나눠줄 환경 배지들과 엽서 등을 담은 큰 배낭을 메고.
이제 그를 알아보는 사람도 많아졌다. 누군가는 ‘환경지킴이’로 부르고 누군가는 ‘괴짜’로 여기기도 한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이 된 불편함은 없는가”라고 그에게 물어보았다. “즐거운 자승자박”이라는 답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