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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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창업 성공기] 나승도 국제익스프레스 사장 / (행정 85) 동문

일본 요코하마시 야마시타 항구. 요코하마 관문인 이 항구의 한켠에는 세관 건물이 버티고 있다. 바로 옆에는 '국제익스프레스'라고 일본어로 적힌 청록색 대형 건물이 자리잡고 있다. 유일하게 한국인 출신이 소유한 보세창고다. 직원 2명과 함께 이삿짐 배달업체로 출발해 지금은 종합 물류업체로 성장한 국제익스프레스 나승도 사장(47)이 소유한 건물이다.

나 사장이 사업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 농번기에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고 겨울에는 서울에서 리어커를 끌면서 장사하던 아버지를 돕기 위해 따라 나선 것이 처음이었다. 그의 부친은 '연탄에 불을 붙이는 번개탄을 사세요'라고 외치는 방법으로 장사를 했다.

그러나 그날 따라 한나절을 돌아다녔지만 한 개도 못 팔았다. '이 방식은 아니다'고 느낀 그는 "제가 팔아보겠습니다"하고 나섰다. 각 가정을 방문해 초인종을 누른 후 '고등학생입니다. 번개탄을 2개씩 묶어서 싸게 팝니다"라고 얘기했다. 순식간에 리어커에 가득 실린 번개탄을 모두 팔았다. 이 방법을 통해 한 달 동안 번개탄을 팔았고 이를 통해 모은 150만원으로 송아지를 한 마리 사서 부친께 드리고 군에 입대했다.

리어커와의 인연을 잊지 못하는 그는 지금도 '내 사업의 출발점은 리어커'라고 말한다. 제대한 후 1985년 국민대 행정학과(야간)에 입학했다. 당시 고교 동창들이 80년에 대학에 들어갔던 것에 비하면 뒤늦은 입학이었다. 입학과 동시에 가난과의 싸움이 시작됐다. 등록금을 벌기 위해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당시 서울 노원구에 대규모 아파트촌이 새롭게 들어서는 것을 지켜보면서 입주자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면 돈을 벌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강남이나 목동에 한꺼번에 아파트 입주가 시작됐을 때를 경험한 선배를 찾아가서 상담을 했다. 선배는 세가지 사업 아이템을 제시했다. 아파트촌이 새로 들어서면 반드시 필요한 것이 슈퍼마켓, 세탁소, 중식당이라고 귀띔해줬다. 그러나 나 사장은 슈퍼마켓은 초기 투자비가 많이 들기 때문에, 세탁소는 기술 없이는 곤란하다고 판단해 포기했다. 다만 중식당은 주방장을 고용하면 운영할 수 있다고 판단해 중식당을 내기로 했다.

그러나 다른 곳과 차별된 전략으로 승부하기로 했다. 대학생이 식당주인이라는 점을 홍보의 포인트로 활용하기로 한 것. 우선 국민대 학생회를 찾아가서 돈을 벌면 장학금을 내고 중국음식 배달은 대학생들에게 맡긴다는 조건을 내걸고 이름을 빌리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국민대 근로학생회 학사반점'이라는 이름으로 중식당을 개점했다. 결과는 대성공. 자장면 주문이 한꺼번에 밀려들면서 이를 배달할 학생을 매주 새로 모집해야 할 정도로 번창했다. 자신의 등록금과 생활비를 충당한 것은 물론 학생회에 약속했던 장학금도 기탁했다.

그러나 대학 졸업을 앞두고 이 중식당을 처분하려고 할 때 그동안 드러나지 않았던 문제가 하나둘씩 밝혀졌다. 납품업체에서 식자재를 일단 납품받고 갚지 못한 외상값 등을 합친 누적된 빚이 1000만원에 달했던 것. 당시 직장 초년병의 급여 수준을 감안하면 빚을 모두 갚는 데는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릴 것으로 생각돼 해외에 나가서 돈을 벌어 갚기로 마음먹었다. 기왕 외국으로 가려면 세계 경제의 주요 도시인 미국 뉴욕이나 일본 도쿄 중 한 곳을 택하기로 했다.

결국 한국에서 가까운 도쿄행을 결정하고 90년 2월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하지만 60만원을 손에 쥐고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어학원을 다니면서 자신처럼 일본어로 의사소통을 제대로 못하는 한국인 유학생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들이 공부하고 돌아갈 때 이삿짐을 3~4박스씩 나르는 걸 도와주다가 아예 전문적인 이삿짐 운송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삿짐 사업을 처음 시작할 때도 유학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리 회사를 이용해주면 성심성의껏 돕겠다'는 편지를 직접 손으로 써서 보냈다.

당장은 필요하지 않더라도 국제익스프레스 전화번호를 메모해 놓은 유학생이 의외로 많았고 이들은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귀국할 때는 어김없이 국제익스프레스를 통해 이삿짐을 부쳤다. 이렇게 유학생이나 주재원들을 상대로 3~4년 동안 이삿짐 운송사업을 하면서 종합 물류사업 쪽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우선 종합 물류업을 하려면 크게 세 가지 사업기반(통관업, 운송업, 창고업)을 갖춰야 한다는 걸 알았다. 이때부터 각 사업 분야 면허취득을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우선 보세창고를 확보하기 위해 나섰다. 그러나 일본인 운송업자도 확보하기 어려운 보세창고를 외국인 청년 사업가가 마련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혹시 재일동포를 비롯해 일본에서 운송업 분야에서 성공한 한국인의 조언을 받을 생각으로 수소문을 했지만 결국 보세창고를 가진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하는 수없이 '맨땅에 헤딩한다'는 정신으로 직접 부딪히기 시작했다.

인맥의 중요성을 깨닫고 통관이나 항만 분야에서 20년 혹은 30년 이상 몸을 담은 일본인 전문가들을 찾아가 잇달아 간부로 영입했다. 정부 관료부터 말단 항만 관계자까지 두루 찾아다니며 고개를 숙였다. 이처럼 노력한 결과 지금은 일본 주요 항구 3곳(도쿄 오사카 요코하마)에 대형 보세창고를 갖게 됐다.

나 사장은 고등학교 때부터 물건을 팔아온 만큼 고객을 끄는 방법을 감각적으로 익혔다. 끊임없이 일거리를 만들고 이를 이뤄내는 과정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국제익스프레스 사원들도 나 사장의 이 같은 태도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의 통관업체들이 평일 오후 5시나 6시까지 일을 하지만 고객이 원하면 평일 오후 8시나 9시에도 항만에서 하역작업을 한다. 시간을 다투는 화물은 주말이나 공휴일도 개의치 않고 출근해 일을 처리한다.

나 사장은 "조금 귀찮고 불편하더라도 이처럼 고객 편에서 생각하고 고객에게 가장 이익이 되도록 선택을 한 것이 회사가 급성장하게 된 비결"이라고 해석했다. 최근에도 일감이 계속 늘어나 회사 매출이 지난해 6월 말 기준으로 350억원에서 올해 6월 말 결산 때는 400억원을 가볍게 넘어설 것으로 전망했다.

■ 나사장의 성공비결

 
어떤경우든 고객에게 "NO" 라고 하지마라

= 나승도 사장이 1990년 2명의 직원과 함께 사업을 시작해 지금의 사업체를 일군 비결은 크게 3가지다.

◆ 남과 다르게 생각하기

= 나 사장은 기존 방식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노력해왔다. 고등학생 시절 번개탄을 팔 때는 호별 방문판매라는 색다른 시도를 했으며 대학생이 운영하는 중국식당이라는 뜻에서 '학사반점'의 이름을 붙일 정도로 발상이 독특하다.

2002 한ㆍ일 월드컵 개최 때는 그의 이 같은 기질이 유감없이 발휘됐다. 월드컵 개막 사흘 전에 일본 운송업체가 포기한 화물('덕수궁 돌담길'을 석고로 떠서 축소한 모형)을 일본으로 운송하겠다고 덜컥 운송계약을 맺은 것이다. 그는 이 조각품은 하나의 컨테이너에 들어가지 않는 만큼 수 개의 토막으로 잘라서 이동시킨 후 다시 접합하자는 아이디어를 냈다. 일본인들은 예술품을 토막 낸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는데 나 사장은 당장 행동에 옮긴 것이다.

◆ 한ㆍ일 양국의 장점 활용

= 한국인의 '빨리빨리 정신'과 융통성을 살렸다. 여기에 일본인의 근면성과 정확성을 접목했다. 이는 터보엔진과 비슷한 효력을 발휘했다는 것이 나 사장의 설명. 사실 한국이나 일본업체가 후발주자인 국제익스프레스를 얕볼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 같은 특성은 외국에 가면 단번에 인정받는다. 지난 1~2년 동안 나 사장은 싱가포르, 대만, 홍콩 등지를 돌면서 제휴를 맺을 운송업체를 물색했다. 그러자 '일본업체가 제휴처를 물색하기 위해 직접 외국을 돌아다니는 것은 처음이다'며 이곳저곳에서 만나자는 주문이 쇄도했다. 이들은 그동안 일본업체와 손을 잡으려고 몇 번 시도했으나 번번이 퇴짜를 맞았던 쓰라린 경험이 있어서 국제익스프레스를 환영했다. 그 결과 국제 익스프레스는 중국 상하이의 '란쉥'을 비롯해 톈진의 'TCI', 베트남의 '타미', 대만의 '돌핀', 홍콩의 '라이즈텍', 태국의 'NCL' 등과 포괄적인 업무제휴를 맺을 수 있었다. 나 사장은 외국인을 만나면 자사의 장점을 '한국인과 일본인의 강점만을 갖춘 기업'이라고 강조한다. 많은 외국 기업인은 박장대소를 하며 계약서에 사인한다고 했다.

◆ 헝그리 정신

= 나 사장은 일본인들도 쉽게 접근하지 못한 분야에 과감하게 도전했다. 주요 항만에 대형 보세창고를 확보한 것이나 통관업, 창고업, 운송업 등 면허를 따야 하는 업종에 차례로 진출했다. 남의 눈치를 보거나 좌고우면하지 않는다.

고객이 무리한 요구를 해올 때도 나 사장은 '노(NO)'라는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일단 "최대한 해결 방안을 찾아서 되도록 하겠다"고 말한다. 다른 업체가 못한 어려운 일을 말끔하게 해결했을 때 단골고객이 된다는 걸 그동안 숱하게 경험했기 때문이다. 나 사장은 밑바닥 인생을 많이 경험한 만큼 '1년 365일 일하고 하루 24시간 일한다'는 태도도 몸에 배어 있다. 이 같은 근면함이 단시간에 일본에서 사업기반을 마련하게 된 배경이 됐다. 다만 철저하게 겸손함으로 무장하고 가능한 한 적을 만들지 않는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우리 속담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 일본사회이기 때문.

나 사장은 "일본은 일을 제대로 하는 사람, 실력 있는 업체는 그대로 평가해주는 사회인지라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다"고 평가했다.

출처 : 매일경제 : 기사입력 2008-06-27 04:11
원문보기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09&aid=00019859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