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SUNDAY] 역사의 승자 무신, 의종을 무신 난 도발자로 규정/박종기(국사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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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종은 환관 무리와 놀러 다니는 일로 날을 보내어 정치를 돌보지 않았다. 국정은 어지럽고 기강은 땅에 떨어졌다. 문신들과 주지육림(酒池肉林) 속에서 음풍농월로 세월을 보내고, 무신을 혹사하고 천대한 결과 마침내 무신의 대란(大亂)을 도발케 했다.”(김상기, 『고려시대사』, 1984). 연회에 빠져 국정 혼란과 기강을 무너뜨리고, 문신을 우대하고 무신을 천대한 의종(毅宗; 1146~1170년 재위)에게 정변의 책임을 묻고 있다. 그런데 정설(定說)과 다름없는 이 견해는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기록을 옮겨 놓은 것이다. “사신(史臣) 유승단(兪升旦)이 말한다. ‘불행하게도 의종은 아첨하고 경박한 무리들을 좌우에 두고 재를 올리고 기도하는데 재물을 기울여 탕진했다. 정치에 쏟아야 할 시간과 정력을 주색(酒色)에 빠져, 풍월을 읊는 것으로 정치를 대신했다. 이로써 점차 무신의 노여움이 쌓여 화(禍: 정변)가 일어났다’라고 했다.”(『고려사절요』 권11 의종 24년 8월 사평(史評)) 무신그룹이 권력 잡고 ‘의종실록’ 편찬 학계의 견해는 『고려사』에 실린 유승단의 의종 평가와 판박이다. 그런데 당시 실록 편찬에 참여한 유승단은 무신정변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처지가 아니었다. 무신권력자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의종실록 편찬 자체가 출발부터 왜곡되었다. “어떤 사람이 무신정권 최고기관인 중방(重房)에 다음과 같이 고발했다. ‘(의종실록) 편찬자 문신 문극겸(文克謙)은 의종이 피살된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했습니다. 국왕 시해는 천하의 가장 큰 죄입니다. 무신으로 사관(史官)을 교체해 사실대로 쓰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왕[명종]도 어쩔 수 없이 무신 최세보(崔世輔)를 사관으로 임명했다. 최세보는 마음대로 사실을 고쳐 (의종)실록을 편찬했다. 이 때문에 실록에는 탈락되고 생략된 사실이 많았다.”(『고려사』 권100 최세보 열전) 최세보는 조상도 알 수 없을 정도의 미천한 가계에다 글도 몰랐는데, 무신정변 덕에 재상 자리까지 올랐다. 실록 편찬의 사관(史官)에는 문신이 임명되던 관례를 깨고, 이때 무신이 처음 임명된 것이다. 의종실록은 최세보가 편찬책임자에 임명된 1186년(명종16) 12월 무렵 시작해 그가 사망한 1193년(명종23) 10월 무렵에 편찬이 마무리된다. 의종실록은 무신정변이 일어난 지 약 20년이 지난 뒤 무신정권의 안정기에 편찬되었다. 그 때문에 무신들은 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정변의 책임을 의종의 실정(失政)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의종 시해 사실처럼 무신들에게 불리한 사실이 많이 생략되었을 것이고, 그 과정에서 기록된 유승단의 의종 평가도 온전할 리 없다. 따라서 무신정변의 원인에 관한 과거와 현재의 기록은 결코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나아가 의종은 과연 문신을 우대하는 문신 친화적인 정책을 펼친 반면에 무신을 천대했을까 의문을 던지게 된다. 역사를 대하며 반면(反面)의 사실을 읽을 수 있을 때 역사의 묘미(妙味)가 있다. “의종이 태자로 있을 때 국왕[인종]은 태자가 장차 왕으로서의 책임을 다할 수 있을까 걱정했다. 왕후 임씨도 둘째 아들 왕경(王暻)을 사랑해 그를 태자로 세우려 했다. 그러나 태자(훗날 의종)의 스승 정습명(鄭襲明)이 충성으로 태자를 가르치고 보호해 폐위되지 않았다.”(『고려사』 권96 정습명 열전) 정습명은 당시 김부식과 함께 문신귀족을 대표하는 정치인이다. 부왕인 인종과 모후를 등에 업은 외척들은 도량이 있고 따르는 사람이 많은 차남 왕경(王暻)을 왕위에 앉히려 했지만 ‘장자 계승’을 주장한 정습명으로 상징되는 문신귀족의 명분에 밀려 의종이 즉위한 것이다. 의종은 즉위 후 묘청 난을 진압해 정치의 주도권을 쥔 김부식정습명 등 유교 관료집단의 요구를 외면할 수 없어, 사실상 이들에게 포위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1151년(의종5) 김부식과 함께 자신을 보필한 정습명이 죽은 뒤엔 자신의 구상대로 정치를 한다. ![]() 고려 내시집단은 국왕 보좌한 신진 관료 그날 저녁 의종은 친위 군사들의 호위를 받아 왕궁으로 돌아와 보현원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다. 그러나 피해를 입은 내시 환관 등이 다시 반발하자, 무신들은 의종을 거제도로 유폐한 후 환관과 내시들을 무더기로 제거한다. 3년 후인 1173년(명종3) 김보당을 주모자로 한 문신들이 거제도에 유폐된 의종을 경주로 모셔와 복위운동을 일으켜 무신에게 저항하자 마침내 이 정변은 문신들에 대한 대량 학살로 확대되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무신정변을 ‘경계(庚癸)의 난’이라 했다. 즉 최초 정변이 일어난 경인년(庚寅年: 1170년)과 복위운동이 일어난 계사년(癸巳年: 1173)의 두 차례 정변을 합해 무신정변이라 했다. 최초의 정변은 의종 측근세력 내부의 권력 다툼이며, 그런 빌미를 제공한 의종에게 일단의 책임이 있지만 의종의 책임은 여기까지였다. 두 번째 정변인 의종 복위 운동이 일어날 때 일반 군인들의 호응 아래 무신들은 문신에 대한 대량 살육을 저질렀다. 의종의 손을 떠난 정변이다. 무신정변은 가까이는 왕실 중흥과 왕권 강화를 시도한 의종과 그에 반대한 문신 관료집단 사이의 대립이라는 파행적인 정치로부터 원인을 찾을 수 있다. 멀리는 이자겸의 난과 묘청의 난 등 12세기 이래 누적된 지배층 내부의 대립·갈등의 산물이 끝내는 무신정변이란 파국을 초래했다. 의종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 그것은 정변을 일으킨 무신 권력집단의 역사왜곡일 뿐이다. 원문보기 : http://sunday.joins.com/article/view.asp?aid=32003 출처 : 중앙SUNDAY 기사보도 2013.11.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