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해외한인의 귀환과 수난]1. 해외로 쫓겨난 한인들 - 장석흥(국사)교수
[경향신문 2004-08-12 18:04]

일제의 압제로부터 벗어난 8·15는 진정한 해방이 되지 못했다. 특히 일본·중국 등으로 쫓겨났던 해외 한인들에게 해방은 또다른 수난의 시작이었다. 해방 직전 5백만에 달했던 해외 한인들은 광복된 조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또다시 전쟁을 치러야 했다. 이중 ‘해방조국’으로 돌아온 한인은 고작 절반 정도. 나머지는 또다시 이국땅에 주저앉아야 했다. 왜 그들은 돌아오지 못했는가. 경향신문은 8·15를 맞아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귀환문제연구팀과 함께 해외 한인들의 귀환(歸還)문제를 5차례에 걸쳐 집중조명한다. /편집자

일본 시즈오카현(靜岡縣) 우라카와마치야쿠바(浦川町役場)에서 1946년 6월부터 9월에 걸쳐 작성한 ‘미귀환자 명부(未歸還者名簿)’에는 한국으로 귀환할 예정자 244명의 인적사항이 기재되어 있다. 우리의 동사무소에 해당하는 야쿠바에서 관할구역의 한국인 중 그때까지 귀환하지 못한 사람들을 조사한 것으로 본적, 이름, 성별, 직업, 생활정도 등을 정리한 문서이다.


이들의 출신지는 경북 안동·경주·의성·예천·김천, 대구, 부산, 경남 울산·거창, 충남 부여, 충북 보은, 전북 순창·남원, 전남 나주·해남 등 다양하다. 244명 중 1명만이 평안도 출신일 뿐 나머지 243명은 모두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남지역 출신이다. 이들 가운데 5~10명 정도는 리(里) 단위까지 본적이 같은 것으로 나타나 있다. 특히 부산의 서대신동을 본적으로 하고 있는 사람이 무려 76명이나 돼 눈길을 끈다.


성별로는 남자가 184명이고 여자가 60명이다. 이 가운데 10여가구만이 가정을 가진 것으로 파악되고 나머지는 독신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직업은 고물상을 하는 2명을 제외하고는 거의가 토공(土工) 내지 목공(木工)으로 막노동을 하거나 무직으로 기재돼 있다. 생활정도가 극히 빈한할 뿐 아니라 불안정한 상태에 있음을 알게 한다. 이들의 이름을 보면 유일하게 1명만이 일본식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을 뿐 모두 한국 이름을 되찾은 것도 발견된다. 명부의 마지막에서 이들을 ‘특권상실(特權喪失)’한 사람들로 규정한 점도 눈에 띈다.


미처 귀환하지 못한 한인들에 관한 간단한 명부이지만, 이 자료는 일본에 건너간 한인의 자취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일본의 한 작은 마을에서 이처럼 삼남지역 각처의 한인들이 막노동으로 살고 있었던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본적이 같고 독신 남자가 많으며, 한결같이 토목공이었다는 사실은 이들이 강제연행으로 끌려왔음을 알려주기에 충분하다. 이들은 해방을 맞은 지 1년이 되도록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최하층의 생활로 연명했으며, 귀환할 수 있는 권한도 박탈당한 상태였다. 여기서 특권을 상실했다는 것은 일본이 한국으로 돌아가는 한인들에게 제공하기로 한 열차편과 배편 등 수송의 의무를 담당하기로 했던 것을 이행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이들 한인이 끌려갈 때는 소위 황국신민으로서 ‘일본인’의 자격을 강요받았으나, 일제 패망 뒤에는 외국인으로서 한국인이 되어 돌아올 수 있는 권리조차 일본에 의해 철저하게 통제되고 있음을 이 자료는 뚜렷이 밝혀주고 있다.


일제에 의해 해외로 강제연행된 한인의 수는 대략 1백2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1939년부터 실시된 강제연행은 침략전쟁이 막바지에 달하면서 더욱 무자비하게 자행되었다. 현재 전남 나주시에 거주하는 박세을옹(80)의 증언은 그와 같은 강제연행의 실상을 생생하게 전해주고 있다. 9세때 조실부모한 박세을옹은 고향인 나주를 떠나 완도에서 고용살이를 하다가, 18세때인 1942년 어머니 제사를 지내기 위해 고향으로 가던 중 장흥의 한 여인숙에 머물렀다.


그런데 야밤에 군서기와 일본 군경이 여인숙을 급습하여 숙박하던 사람들을 강제로 창고로 끌고 갔다. 이미 창고에는 이들 외에도 여러 사람들이 연유도 모른 채 감금되어 있었다. 이튿날 이들 27명은 일본 군경의 감시아래 부산으로 보내진 다음, 배를 타고 홋카이도로 끌려갔다. 홋카이도 탄광은 일본 탄광 중에서도 악명이 높아 죄수들을 가두어놓은 독방이라는 뜻의 ‘다코베야(ダコ部屋)’라 불리던 곳이었다. 박옹은 3년동안 다코베야 생활을 하던 중 죽을 고비도 여러번 맞이하다가 해방과 함께 겨우 귀환할 수 있었다.


한인의 기구한 운명은 일본에 끌려간 한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해방 당시 해외 한인은 5백만명에 달했다. 이는 당시 한국인의 20%가 넘는 숫자였다. 이들의 대부분은 일제 식민지 지배로 농토를 빼앗기고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 침략전쟁에 강제로 끌려간 사람들이었다.


강제연행을 통하여 한인은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 만주, 시베리아, 몽골, 대만, 동남아시아 등 각처에 군인·군속·일본군 ‘위안부’·노무자 등으로 일본의 침략전선이면 어디든 끌려가 혹독한 시련을 겪어야 했다.


일제의 인력수탈은 강제연행에 그치지 않았다. 가혹한 농업수탈에 의해 농토를 잃은 수많은 사람들이 실업자나 농업노동자로 전락했고, 생활수단을 빼앗긴 사람들은 일본이나 중국 동북지역, 러시아 연해주지역 등 해외로 떠나 유랑생활을 해야만 했다. 이들의 해외이주는 강제연행된 사람들과 비교되면서 ‘자발적’인 것으로 잘못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에 의해 삶의 터전을 박탈당한 사람들이 고향을 등지지 않을 수 없었던 사정을 고려할 때, 이들의 해외이주는 의심할 여지없이 식민지 지배의 강제성에서 기인한 ‘타의적’인 것이었다.


해외로 쫓겨나간 한인들은 일제의 침략전선에서 8·15 해방을 맞이하였다. 일제 침략전쟁의 희생자인 이들은 포츠담선언 제9항에서 명시된 바처럼 인도주의 원칙에 따라 조국으로 귀환되어야 마땅한 일이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강대국의 이익이 우선되었던 전후(戰後) 처리과정에서 이들의 인권은 또다시 유린당하고 말았다. 해외로 쫓겨가거나 끌려갈 때는 일제의 강제에 의한 것이었지만, 일제가 패망한 뒤 돌아올 때는 소련·중국·미국·일본 등 해당국의 이해에 따라 향방이 결정되는 비극적 운명이 이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한인의 수가 2백만명이 넘었던 일본 지역의 경우 연합군사령부와 일본의 무책임한 처리에 의해 한국인들은 ‘해방국민’의 대우를 받지 못하였다. 다행히 귀환길에 오른 한인들조차 일본의 무계획한 귀환정책으로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8월26일 한인들을 태운 ‘우키시마마루(浮島丸)’가 교토(京都) 앞바다에서 폭파되어 1,000여명의 한인이 희생당한 ‘우키시마마루사건’은 그 대표적 사례이다.


해외 한인이 2백30만명에 달했던 중국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이 벌이는 내전의 와중에서 많은 한인들이 재산을 몰수당한 채 강제추방되는 수난을 겪었다. 소련의 중앙아시아와 소련군 점령지역인 사할린에서는 아예 한인의 귀환이 원천봉쇄되었다. 동남아시아의 침략전선에 강제로 끌려간 한인들은 연합국 점령군의 포로나 ‘전범(戰犯)’으로 취급받으며 가혹한 고난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국제사회의 냉엄한 현실 앞에서 5백만의 해외 한인 가운데 돌아온 사람은 절반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억류되거나 귀환의 꿈을 접은 채 현지 정착의 길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해방이 되었어도 돌아오지 못하고 현지에 잔류한 한인의 수는 중국 동북지역의 1백40만, 일본지역 60만, 소련지역 40만 등 대략 2백50만명에 이르렀다.


오늘날 한국이 세계에서 네다섯번째로 해외이민이 많은 국가가 된 것은 그와 같은 한인의 불행한 이주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식민지 지배의 비극적 운명 속에서 해외로 쫓겨나간 한인의 귀환문제는 단순한 ‘귀향’ 내지 ‘귀국’과는 그 본질이 다른 것이다. 일제가 저지른 반인류주의적 과오를 청산하는 시각과 기준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본질에 다가설 수 있으며, 오늘날 해외 한인사회의 역사성도 규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 근현대사에서 깊은 상처로 남겨진 한인의 해외이주는 말 그대로 민족의 수난사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이 문제를 오랫동안 방치시켜 놓았다. 제국주의 침략으로 얼룩진 식민지 시기 한인의 이주와 귀환, 그리고 미귀환의 문제를 해명하는 작업은 더 늦출 수 없는 민족적 과제이다.


〈장석흥/국민대 교수·국사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