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고생하는 민주주의 / 조중빈 (정외) 교수

[중앙일보 조중빈]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고생하고 있다. 왜 그럴까. 우선 민주주의라는 말이 우리를 혼란스럽게 만든다. 민주주의가 'democracy'의 번역어라는 것은 대부분 알고 있지만 그것이 잘된 번역인지를 따지는 사람은 별로 없다.

뒤에 붙은 말부터 따져 보자. '-주의'하면 영어의 '-ism'을 번역한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데 'democracy'에 '-ism'은 없고 그 자리에 '-cracy'가 있다. '-cracy'는 통치 방식을 뜻한다. '주의' 앞에 붙은 '민주'라는 말은 뜻이 애매모호하다. 글자만 보면 민(民)이 주인(主人)이라는 뜻으로 해석될 가능성이 많은데 그래서 그런지 한국 민주화운동의 와중에 누가 '주인'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투쟁하는 것을 수다히 보아 왔다. 국민이 국가의 주인이니까 노동자가 회사의 주인이고 학생이 학교의 주인이라는 식의 발상이 만연했다. 그런데 '민주'에 상응하는 영어말 'demo'에는 주인이라는 뜻은 없고, 어원상으로 군중.인민.민중 등 사회를 구성하는 다수를 지칭할 뿐이다.

이제 뜻으로 새롭게 합성해 보자. 민주주의는 '국민주인주의'가 되고 democracy는 '다수지배체제', 즉 '민치제(民治制)'가 된다. 우리말이 가치지향성을 나타내고, 영어가 통치방식을 가리킨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글자 풀이가 곧 개념 정의는 아니지만 원산지와 수입국에서 관찰되는 통념을 대비시키는 데 이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 같다.

민주주의를 통치방식으로 이해하면 많은 전제국가들이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예컨대 북한에서도 다수의 국민이 투표는 하니까?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질까봐 서구에서는 대비책을 세웠다. 다수의 지배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대의(代議)민치제를 고안해 냈고, 다수가 폭도가 되어 개인의 목숨을 위협하는 것을 막으려고 자유민치제를 주창했다. 그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해 권력을 분산시키고, 의회.정당.언론.이익집단 등에게 민중의 변덕스럽고 거친 압력을 걸러내는 역할을 맡겼다.

'국민주인주의'가 이런 '자유주의'를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대답은 "별로"이다. '자유'는 사회에 대해 개인이 가지는 개체성.독자성에 대한 의식이 투철할 때 소중하게 여기게 되는데 우리는 집단성.공동체성이 강해 자유의식의 발현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또한 권력에 대한 두려움도, 경계도 별로 없다. 그래서 그 긴 세월이 흐르고도 절대권력을 견제하는 대의집단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결과는 과두정치요 금권정치이고, 작금까지 한나라당이 '차떼기'에 시달리고 있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이 그리는 민치제는 무엇인가. 대의집단이 썩었으니까 그 거름 장치를 제거하고 인민과 직접 상대하겠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포퓰리즘과 인터넷 폭민정치다. 포퓰리즘을 '인기영합주의'라고 번역해 인기 탤런트를 생각나게 하는데 포퓰리즘의 정수는 인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휘두르는 폭력성에 있다. 그 폭력이 되돌아와 자기 목을 쳐도 "짹"소리 못하게 만드는 무차별적 폭력 말이다.

금권정치와 포퓰리즘 사이에서 고생해 온 한국 민주주의를 구원할 길은 없는가. '주의'에서 벗어나 '통치방식'으로서의 민주주의에 집중하는 것이다. 자유주의자는 수구파이고 평등주의자는 진보.개혁파라는 식의 발상은 한국 사람의 정서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정치체제의 비민주성을 은폐하고 있다. 자유주의는 한국인이 저어하는 바이지만 평등주의로는 한국인이 세계를 놀라게 하고 있다. 지금 한국 정치 앞에 놓인 과제는 자유와 평등, 보수와 진보가 아니라 도적으로부터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는 것이다. 밤에 차를 대나 낮에 차를 대나 차떼기는 마찬가지다.


조중빈 국민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