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중앙 시평] 학문도 기초체력부터 __ 韓敬九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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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7. 12. - 중앙일보 - 축구열풍은 대학가에도 영향을 미쳤다. 수업결손이 많아져 종강(終講)에 애를 먹었고 중간고사보다 기말고사 답안은 확실히 수준이 낮아졌다. "응원하느라 공부를 못해 죄송하지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것이 자랑스럽다"는 백지답안을 제출한 학생들도 있었다. 멋있는 것인지 미련한 것인지? 약간 갈등을 느끼면서도 이들을 낙제시키는 것이 더 교육적이라 생각했던 교수들은, 월드컵을 축하해 운전면허증도 돌려주고 벌점도 없애준다는 화끈한 정부의 조치에 아마 적지않게 당황하고 있으리라. 나와 남의 소중한 생명을 위태롭게 했던 교통법규 위반자들도 모두 용서해주는 국민대화합의 시대라는데… 쩨쩨한 사람이 됐다. 교육자 노릇도 쉽지 않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축구열풍의 엄청난 교육적 효과도 기대해볼 수 있다. '기초체력의 중요성'이나 '연고에 얽매이지 않는 실력 중시' 등은 누구나 알고 있는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 실천이 얼마나 중요하고 어려운지를 절실히 느끼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기초 중시와 연고주의 타파가 한국사회의 다른 영역에까지 확대된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한 의미에서 뒤늦은 감이 있지만 학술진흥재단이 추진하고 있는 인문사회계 기초학문 육성을 위한 연구지원은 학문의 기초체력을 강화하는 매우 바람직한 사업이다. 형편이 낫다는 이공계에서도 얼마 전까지 "기초연구는 선진국에서나 하는 것이니 엄두도 내지 말고, 응용 및 가공기술에 집중 투자하자"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기초가 약하면 결국 응용과 가공도 일류가 될 수 없고, 따라서 큰돈도 벌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라도 정부 일각에서 인식하고 대책을 마련한 것은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다. 비록 선거를 의식한 선심공세라거나 나눠먹기 식으로 집행될 것이라는 비판과 우려도 있었지만, 연구신청에 대한 심사의 공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각종 제도적 장치와 절차는 상당히 개선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국내외 지역연구나 국학 고전연구 등 비교적 소외됐던 분야들도 혜택을 받게 됐다. 학술진흥재단이 앞으로 예산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고 심사의 문제점들을 꾸준히 개선해 이러한 사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한 가지 희망을 말해본다. 교육부나 학술진흥재단에서 대중교통 수단으로 가기 편한 곳에 건물을 하나 마련하면 어떨까? 건물에는 여러 개의 연구실과 편의시설이 있고, 각 대학 및 공공 도서관과 대출협정을 체결한 소규모 전자도서관, 그리고 크고 작은 세미나실도 몇개 있어서 토론도 하고 공개강의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러한 연구실을 시간강사로 각 대학을 전전하고 있는 '보따리 장수' 미취업 박사들에게 학술지 연구논문 게재나 전문서적 번역 등을 조건으로 매달 일정액의 보조비와 함께 지원하면 어떨까? 대학교수들이 연구과제를 신청하면서 미취업 박사들을 '전임 연구인력'으로 일정 수 이상 확보하도록 하는 현행 방식도 좋지만 미취업 박사들 중 일부는 인간관계 때문에 자신의 연구주제와 별 상관없는 연구에 억지로 동원됐다고도 하고, 상당수 지방대학 등에서는 미취업 박사를 구하지 못해 아예 연구비 신청을 포기했다고도 한다. 학문 후속세대를 지원하는 사업이 자칫 연고주의로 이어지지 않도록,소장 학자들이 자신의 분야를 깊이 천착할 수 있고 또한 눈치를 보지 않게끔 미취업 박사에 대한 지원은 연구과제 지원과 분리해 별도로 실시하면 어떨까 한다. 젊은 학자들이 잔뜩 모여 있으면 무언가 창조적인 일이 일어날 것 아닌가? 초기에는 건물을 마련하느라 예산이 좀 들겠지만 결국은 돈이 더 드는 것도 아니다. 공간을 더욱 확보해 일정한 요건을 갖춘 가난한 학회들에는 사무실을 마련해주면 어떨까? 이러한 인프라가 만들어지면 학계의 의사소통이 획기적으로 활성화될 것이며 학제간 연구의 활성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기초를 다지기 위해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정말로 많다. 韓敬九 국민대 교수.인류학 ▶약력=서울대 인류학과 및 동대학원 졸업.미 하버드대 인류학 박사. 강원대 인류학과를 거쳐 현재 국민대 국제학부 교수.주요 저술로 '공동체로서의 회사''시화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낯선 곳에서 나를 만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