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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한인의 귀환과 수난] 3. 귀환하는 한인들 - 일본지역 - 채영국(한국학연구소)
[해외 한인의 귀환과 수난] 3. 귀환하는 한인들 - 일본지역





‘이래 죽으나 저래 죽으나 마찬가지니 도망가자.’ 1945년 8월5일쯤 안창선옹(87)은 동료 4명과 함께 군대병원을 탈출했다. 3년 전인 1942년 경기 양주에서 80여명과 함께 규슈의 미쓰이(三井)광업소로 강제연행됐던 그였다. 열흘만 지나면 해방이라는 사실을 알 리 없었던 그로서는 목숨을 건 탈출작전이었다. 마침내 해방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그는 광업소를 찾았다.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탈출한 사람에게는 어떠한 임금도 지불할 수 없다고 하여 맨손으로 쫓겨났다. 안옹은 막노동으로 겨우 배삯을 마련하여 귀환할 수 있었다.


연합국 군최고사령부는 귀환하는 한인에게 배편을 무상으로 제공한다고 했으나, 안창선옹처럼 자신이 배삯을 마련해야 했던 경우가 많았다. 몇년동안 강제노역에 시달렸건만 돌아갈 배삯조차 손에 쥘 수 없었던 한인들의 비참한 운명은 일제 식민지배의 잔학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일본 지역 한인의 귀환은 일제 패망이 예견되던 1944년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미군 전투기가 일본 상공을 넘나들며 무차별 공습을 퍼붓자, 일제 패망만을 손꼽아 기다리던 한인들이 소형 발동선에 몸을 싣고 고국을 향하여 필사적 탈출을 시도하였다. 이렇게 해서 1945년 8월15일 전까지 귀환한 재일 한인은 대략 30여만명에 이르렀다.


8·15 해방이 되자 일본 내 각처에 살던 한인들은 가까운 항구로 몰려들었다. 한국간 정기연락선이 운항하던 시모노세키(下關) 항구에는 수만명의 한인들이 몰려와 배가 떠날 날을 기다리며 노숙을 하는 등 대혼잡을 이루었다. 이는 시모노세키의 경우만이 아니었다. 하카다(博多)·센자키(仙崎)·사세보(佐世保)·마이즈루(舞鶴)·하코다테(函館) 등 한국과 왕래가 가능한 항구는 한인들로 대만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귀환길이 정식으로 열리기 전이었으므로 많은 한인들은 직접 소형선을 구입하든지 아니면 빌려서 귀환을 서둘렀다. 당시 일본 해안에는 미군과 일본군이 설치한 기뢰가 많았으나, 소형 선박은 그것을 감지할 장비를 갖추지 못했다. 때문에 기뢰에 의해 폭침되는 경우도 많았다. 게다가 거세게 불어닥친 태풍은 귀환길을 훼방했다. 한인들은 모진 태풍을 뚫고 고국을 향하였으나, 대한해협을 채 건너기도 전에 많은 사람들이 희생당했다.


기타큐슈(北九州)·오다야마(小田山)의 묘지에 집단 매장된 한인의 참상도 그러한 사례였다. 국민대 귀환문제연구팀은 2003년과 2004년 세차례에 걸친 조사과정에서, 시골의 조그만 포구에서조차 희생당한 한인의 비극적 참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저 유명한 우키시마마루(浮島丸)의 참상은 귀환길에서 생겨난 가장 비극적 수난사였다. 일본 해군 특별수송선이던 우키시마마루는 1945년 8월24일 동북지역의 오미나토항에서 강제연행 한인 2,838명, 일반 한인 897명을 태우고 부산을 향해 출발했으나 도중에 교토(京都)의 마이즈루로 회항하다가 갑자기 폭발, 침몰해 1,000여명의 한인이 희생당했다. 우키시마마루 폭발사고의 원인은 일본군의 의도적 폭침이었는지, 아니면 미군 기뢰에 의한 우발적 사고였는지 지금껏 밝혀지지 않은 채 미제사건으로 남아있다.


일본 지역에서 한인의 귀환이 정책적으로 수립된 것은 1945년 11월이었다. 이후 한인의 귀환은 연합군 군최고사령부와 일본 정부의 통제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때 일본 정부는 연합국 군최고사령부의 묵인 아래 ‘사회불안’을 내세워 군인과 군속, 강제연행된 한인들을 우선 귀환시키고, 일본의 경제복구에 필요한 탄광 노무자 등은 가능한 한 귀환을 연기시켰다.


한인들은 밀린 임금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귀국길에 1,000엔 이상의 돈을 가져올 수 없는 조치에 의해 빈털터리로 돌아와야 했다. 해방이 되었건만 재일 한인은 최소한의 권리조차 박탈당한 채 규제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다. 1945년 11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약 5개월 동안 귀환한 재일 한인의 수는 90여만명에 이르렀다.


한인의 귀환이 점차 줄면서 연합국 군최고사령부는 1946년 3월까지 귀환을 희망하지 않으면 배편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발표하였다. 이때까지 일본에 머물던 한인의 수는 대략 65만명이었다. 이들 중 귀환을 희망한 사람은 52만명이었다. 잔류 한인 중 80%가 귀환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들 희망자 가운데 약 10%만이 귀환길에 올랐을 뿐이다. 1,000엔으로 한정한 귀환지참금으로는 한국에 돌아와서 일가족이 채 한달도 살아가기 힘든 액수였다. 때문에 60여만명의 한인은 한시도 잊지 못했던 귀향의 꿈을 접은 채 일본 정착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재일 한인의 귀환은 남한 지역에 한정하여 이루어지다가, 1946년 12월 미국과 소련간에 협정이 맺어지면서 북한 지역으로의 귀환길도 열렸다. 당초 1만명의 귀환을 예상했으나 1947년 1월 현재 북한으로의 귀환 희망자는 1,423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실제 귀환한 한인은 351명에 그치고 말았다. 이후 북한 지역으로의 귀환은 1959년부터 ‘북송(北送)’이라는 또다른 형태로 이루어져, 1984년까지 187차에 걸쳐 9만여명이 북으로 건너갔다.


재일 한인의 귀환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재일본조선인연맹(조총련의 전신)이다. 당시 재일 한인사회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이 단체는 1945년 10월 결성된 이후 연합국 군최고사령부와 일본 정부를 상대로 한인의 권익과 귀환문제를 해결하는 데 앞장섰다. 이 연맹에서는 한인들이 몰려 있는 각 항구에 조사원을 파견해 귀환자 명부의 작성, 귀환증명서 발급 등 귀환 지원활동을 벌이는 한편 한인들이 남기고 간 재산을 관리하기도 하였다.


또한 귀환자가 많았던 하카다에는 귀국동포원호회, 센자키에는 조선인구원회 등을 조직하여 수용소를 마련하는 등 귀환에 따른 제반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재일본조선인연맹의 귀환 지원활동은 연합국 군최고사령부의 제재를 받아 1946년 4월 이후 더 이상 전개될 수 없었다. 이후 재일 한인의 귀환은 소규모로 이뤄지다가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면서 정지되고 말았다. 6·25전쟁이 일어난 다음날 627명의 한인이 마이즈루에서 귀환선을 타기 위해 대기하고 있었으나 끝내 승선하지 못했으며, 이후 ‘귀환선’은 다시 출항하지 않았다.



해방을 전후한 시기 일본에 있던 한인의 수는 대략 2백20만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 중 일본에 정착한 한인이 60만명 정도. 결국 귀환하거나 도중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1백60여만명에 달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채영국/국민대교수·한국학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