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그들은 왜 달렸는가? / 조현신(테크노디자인전문대학원) 교수

영화 ‘불의 전차’ 속의 달리기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고도의 훈련과 극기, 집념과 승부가 펼쳐지는 스포츠 세계에서는 많은 휴먼 드라마가 탄생한다. 영화 ‘불의 전차’는 몇 겹의 스토리텔링이 다각적으로 교차하면서 전개되는 불후의 스포츠 명화로 꼽힌다.

이 영화는 1924년 파리 올림픽에 출전했던 영국 마라톤 대표 선수 두 명의 실제 이야기를 그리고 있 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는 일념으로 100m 대회에 출전하였지만 주일(일요일)에 예선이 열린다 는 이유로 출전을 포기한 선수 에릭 리델, 케임브리지대에 들어갔지만 유대인이라고 여전히 무시와 차별을 당하는 것에 분노하여 챔피언이 되어 자신을 인정케 하겠다는 일념으로 달리는 헤럴드 에이 브러햄의 이야기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제목은 영국의 시인 윌리엄 브레이크의 시에서 차용되었는데, “나에게 이글거리는 불의 활을 가져다 다오, 내게 불의 전차를 가져다 다오, 나는 정신적 분투를 멈추 지 않으리라”라는 시구로 끓는 듯한 투지와 국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성공회 성가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그해 아카데미 작품상, 감독상, 의상상, 음악상 등 네 부문에서 수상하였으며 칸 영화제와 골 든 글로브에서도 수상하였다. 특히 반젤리스가 작곡한 배경 음악 앨범은 빌보드 차트에서 1위를 한 이후 여전히 다양한 버전으로 연주되며 사랑받고 있다.

대비의 레이아웃으로 시작된 첫 장면

영화의 첫 화면은 심장의 박동처럼 피아노의 비트 리듬과 바이올린의 화음이 펼쳐지는 가운데 대각 선 구도의 해변을 일군의 남자들이 달리고 있다. 푸른 바다, 갈색의 모래사장을 배경으로 흰색의 운 동복과 파도, 바닷물을 튕기는 강인한 맨발, 환히 웃는 인물들의 표정이 클로즈업된다. 이런 장면을 배경으로 “가슴에는 희망이 차오르고, 두 발에는 날개가 돋는다”라는 도입부의 내레이션은 관객을 스코틀랜드 해변으로 감각적으로 흡인하고 있다. 여기서 디자인의 관점에서 왜 해변을 사선의 앵글 로 잡았는지 역으로 추정해 보자. 사선은 수평선이 주는 평안과 수직선이 주는 긴장 사이에 존재하 는 선이다. 이 선은 방향성을 지닌 운동을 보여 주는 역동적인 조형 요소로서, 감독은 시각적 구도를 통해 이 영화의 생동성을 표현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이들의 달리기는 멀리 보이는 웅장한 건물들의 군집으로 향하는데 마치 그 종착역이 수직으로 거대하게 버티고 있는 세상이며, 그 속에서 모든 스 토리가 생성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듯하다.
주인공 에릭 리델과 해럴드 에이브럼스를 클로즈업하던 카메라는 멀리 떨어진 곳의 엑스트라 두 명에 게로 옮겨 간다. 그들의 뒷모습이 롱 컷으로 잡히는데 이들 중 한 명은 세월을 지나온 노인이며 한 명 은 앞으로 그런 달리기의 세계로 들어가야 할 어린아이이다. 뛰고 있는 청년들, 노인과 어린아이. 클로 즈업과 롱 컷, 다 갖추어 입은 옷과 자연스러운 복장. 길게 이어진 수평의 해변 끝 수직으로 솟은 거대 한 건물들, 모든 것이 대비된다. 움직임과 정지, 생동과 긴장, 혹은 설렘과 추억 등 대조의 레이아웃을 보여 주면서 영화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첫 장면은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런던 심포니 오케스 트라의 연주와 함께 세계적 코미디언 ‘미스터 빈’이 뛰는 장면으로 각색되어 뜻밖의 즐거움을 주었다. 이 영화를 디자인에서의 시각적 효과, 즉 상징의 대비를 통한 효과의 극대화라는 측면에서 좀 더 살 펴보자. 우선 주인공들의 훈련 장소는 모래사장이나 푸른 초원 등으로 설정되어 있다. 그곳은 정말 그림처럼 아름답지만 고요하다. 오로지 코치와 선수만 있는 이 공간은 승리라는 하나의 목표를 위해 외롭게 자신을 상승시켜야 하는 공간이다. 또 하나의 공간은 이러한 훈련의 결과를 세상에 선보이기 위한 협상과 타협의 공간이며 그곳에서는 상호 간의 욕망, 신념들이 부딪친다. 대표적으로 해럴드가 자신에게 스포츠맨십이 없다고 비난하는 총장과 대면하는 공간, 에릭이 올림픽조직위원장과 언쟁을 벌이는 리셉션 공간, 출전을 권유하기 위해 날아온 영국 왕세자와 만나는 공간은 상징적인 기호로 채워 그들의 심리적 부딪침을 더욱 부각한다.

에릭 리들의 달리기 장면은 힘찬 음악과 치켜든 얼굴, 햇살과 바람에 날리는 머릿결의 슬로 장면으로 묘사되면서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더 높은 존재를 향한 환희로 끝남을 보여 준다.

 

고독한 훈련의 공간과 상징적 협상의 공간

화려한 복장, 높은 천장과 고색창연한 가구들이 갖추어진 그 공간은 신앙인으로서의 한 개인의 결단,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싶은 상처 입은 청년의 투지가 세상의 가치관과 권위, 욕망과 대면하여 분 투를 벌이는 심리 상태를 더욱 배가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특히 아카데미 의상상을 받은 작품 답게 이 영화에서의 의상은 당대 영국인들의 관습과 문화를 세밀하게 표현하고 있다. 케임브리지대 학생들의 전유물인 듯한 감색 재킷과 흰색 바지, 공중으로 날려지는 모자, 영국 올림픽조직위원장의 권력의 상징인 듯한 붉은색 행커치프와 부토니에르, 에릭의 동생 지니와 해럴드의 연인 시빌의 드레 스 색채와 형태의 대조 등은 그들의 가치관을 표현한 상징적 기호이다.
대비의 기법을 사용하여 주제를 드러낸 이 영화의 마지막 결승전 역시 백미로 꼽힌다. 우연히 주어진 400m 경기에서 기적처럼 승리하는 에릭 리들의 달리기 장면은 힘찬 음악과 치켜든 얼굴, 햇살과 바 람에 날리는 머릿결의 슬로 장면으로 묘사되면서 그의 궁극적인 목적이 더 높은 존재를 향한 환희로 끝남을 보여 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해럴드의 결승 장면에는 배경 음악도 없이 오로지 목표에만 집중하는 한 인간의 고독하고 긴장된 표정만이 슬로로 클로즈업된다. 목표를 달성한 그들에게 그 성 공의 의미를 시각적으로 묻는 장치인 것이다. 에릭은 올림픽 다음 해에 다시 선교사로 중국에서 사역 하다가 1945년 2월 수용소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해럴드는 영국체육회의 임원으로 끝까지 활약하였 다. 이 영화는 스포츠 영화이지만 이 영화를 다 보고 나면 주인공들의 삶이 나의 삶과 중첩되면서 나 는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는가를 묻게 된다. 매 순간 역량을 닦아야 하고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세상 과 협상한다는 점에서 인생은 스포츠의 다른 버전임에 틀림없다. 그리고 고독한 훈련 과정과 협상하 는 과정의 궁극적인 결과는 내가 무엇을 위해 달리고 있느냐는 질문에 숨겨져 있을 것이다.

 

글을 쓴 조현신은 현재 국민대학교 테크노디자인대학원에서 디자인 역사와 이론을 가르치고 있다. 우리의 일상에서 친근하고 낯익은 한국 디자인 역사를 연구하고 있으며, 특히 근대기에 형성된 한국적 정서의 디자인화에 관심이 많다. 작년에 <감각과 일상의 한국 디자인문화사>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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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월간 서울스포츠 | 2019년 12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