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속의 국민
화요포럼/산업인간과 디지털 현실 / 배규한 한국청소년개발원장 (사회학과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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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신문 2004-12-14 15:27] 1960년, 커(Clark Kerr)와 그의 동료들은 '산업주의와 산업인간'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들이 제시한 ‘산업인간 가설’은 그후 수렴이론에 관한 수많은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산업인간 가설이란 한마디로 “사람들이 근대적 산업기술에 접하게 되면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문화적 배경에 관계없이 사회적 행위나 의식, 태도 등에서 유사하게 변해 간다”는 것이다. 산업화가 세계적으로 확산되면서 산업기술은 실제로 노동방식이나 직업구조 뿐 아니라 사람들의 행동양식과 사고방식, 그리고 가치관까지 바꾸어 놓았다. 또한 다양한 모습의 전통적인 사회들이 산업화되면서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여러 측면에서 유사한 모습으로 수렴되었다. 1980년, 토플러(Alvin Toffler)는 '제3의 물결'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그는 인류문명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킨 농업화, 산업화에 이어 3번째 물결인 '정보화'가 가져올 미래사회의 놀라운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1990년대 들어서면서 커와 토플러의 미래전망은 더 이상 미래가 아닌 현실로 나타났다. 공산주의의 몰락으로 냉전체제가 붕괴되면서 세계가 하나의 생활권으로 통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정보기술의 놀라운 발달과 확산은 생산양식이나 산업구조뿐 아니라 일상생활의 틀까지 바꾸어 가고 있다. 21세기의 개막과 더불어 한국인들도 시대의 변화를 실감하게 되었다. 2002년 한국인들은 월드컵 대회기간을 통하여 드러난 청소년들의 새로운 모습을 보며 이들을 ‘W세대’라고 명명했다. 그 해 12월에는 지역적 기반도 정치세력도 없이 오로지 소신과 젊음으로 새 정치를 주창해 온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2004년 총선에서는 대부분 신인들로 구성된 신생정당이 과반수 의석을 얻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변은 구시대 정치에 대한 실망과 새로운 정치에 대한 국민적 기대가 낳은 결과였다. 정치인들도 이러한 변화를 감지한 듯 17대 국회출범에 즈음하여 여야는 한목소리로 “상생의 정치”를 약속했다. 그로부터 8개월, 국민들은 벌써 실망하고 있다. 정치가 전혀 변한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회적 패러다임이 바뀌고 국민들도 변했는데 한국의 정치는 여전히 산업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냉전시대의 유물이 된 이념갈등과 산업사회의 계급갈등이 아직도 한국의 정치를 뒤덮고 있으며, 새로운 정치실험은 번번이 과거의 덫에 걸려 좌초되고 만다. 정보기술은 산업기술과 많은 차이를 보인다. 산업기술은 대부분 물질의 생산과 변형에 관한 것인데 비해, 정보기술은 주로 비 물질에 관련된 것이며 신체보다는 정신에 필요한 내용들을 다룬다. 산업사회에서는 기계를 중심으로 모여서 일하지만, 정보사회에서는 각자 편한 곳에서 네트워크를 통해 일한다. 산업기술은 배타적이지만 정보기술은 공유성이 크다. 또한 정보기술은 산업기술에 비해 상대적으로 쓰레기나 오염물질을 적게 배출하며 환경파괴의 정도도 낮다. 기술의 특성이 상이한 만큼 산업인과 정보인은 다르다. 산업인은 이분법적 논리로 무장하고 통일성을 추구한다. 그러나 정보인은 다원주의적 가치관을 중시하며 다양성을 지향한다. 산업인은 경쟁을 당연시하며 승리를 구하지만, 정보인은 다른 사람과의 조화를 귀히 여기며 공생을 추구한다. 정보사회에서는 누구나 자신의 주장을 강력히 펼 수 있으므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기보다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기준에서 보면 한국의 정치인들은 아직도 산업인의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다. 지식으로는 정보사회의 특성을 이해하고 미래지향적으로 부응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가치관이나 행동양식은 여전히 산업사회의 틀을 깨뜨리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머지않아 디지털 시대에 부응하여 변하는 정치인은 살아남고, 구시대적 틀을 깨지 못한 채 그 속에 갇혀있는 정치인은 몰락할 것이다. 해마다 2월이면 북쪽의 찬 기운과 남쪽의 따뜻한 기운이 부딪치며 한동안 흙먼지를 일으키지만, 결국 찬 기운은 물러가고 따뜻한 기운이 천지를 뒤덮는다. 머지않아 산업정치인들은 밀려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배규한 한국청소년개발원 원장/국민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