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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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新고전 50권]<4>그리스인 조르바 / 이명옥(미술)겸임교수

[동아일보 2005-08-11 05:03]


치수가 작은 옷을 입은 것처럼 삶이 갑갑하게 느껴질 때, 단 한 벌뿐인 인생이 싸구려 기성품처럼 여겨질 때, 마음의 지퍼를 열어 꽉 졸라맨 감정을 해방시키고 싶을 때, 독자여!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걸작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으라.


빼어난 고전들을 단숨에 제쳐 두고 이 책을 강력 추천하는 까닭이 있다. 바로 주인공 조르바가 현대인들의 신흥 종교인 참살이(웰빙)의 원조이기 때문이다. 그는 가공되지 않은 날것의 영혼을 지녔으며, 천연의 감정을 들판에 방목해 인생을 살찌운 건강형의 표본이다.


이른바 조르바형 인간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킬 만큼 파격적인 인생관을 제시한 그!


그렇다면 조르바식 삶이란 과연 어떤 것일까? 책장을 펼쳐 보자.


‘확대경으로 물속을 들여다보면 벌레가 우글거려요. 자, 흉측한 벌레 때문에 갈증을 참을 거요, 아니면 확대경을 확 부숴버리고 물을 마시겠소?’


혹은 ‘새끼손가락 하나가 왜 없느냐고요? 질그릇을 만들자면 물레를 돌려야 하잖아요. 그런데 왼쪽 손가락이 자꾸 거치적거리지 않겠어요? 그래서 도끼를 내리쳐 잘라버렸어요.’


자신의 욕망에 걸림돌이 된다면, 설령 소중한 손가락이라 할지라도 가차 없이 잘라버리는 인간! 즉 본능에 채워진 족쇄를 자유롭게 풀어버린 사람이 곧 조르바형 인간인 것이다.


책에는 조르바와 대조되는 또 한 사람의 주인공이 등장한다.


조르바가 ‘두목’이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그는 정신을 육체보다 우위에 두는 지식인의 전형이다. 그는 이성으로 재단한 인생만이 진실한 삶이라고 여긴 나머지 퇴화된 본능과 감각을 복원시킬 엄두조차 내지 못한다.


그러나 진화된 그의 육신에도 원시형 인간이 둥지를 틀고 있었던가.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고 있다. ‘나는 조르바가 부러웠다. 내가 펜과 잉크를 통해 배우려 했던 것을 그는 살과 피로 싸우고 죽이고 입을 맞추면서 살아오지 않았는가.’ 주인공의 뼈아픈 탄식은 책을 읽는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염된다.


대체 왜 우리는 조르바처럼 삶에 다걸기(올인)하지 못하는 것일까? 바로 자신이 무엇을 갈망하는지조차 모르는 인생 맹(盲)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너무도 익숙해서 혹은 너무 쉽다는 이유를 내세워 자신을 전혀 공부하지 않는다.


가족이나 연인, 친구가 바라는 삶이 진짜 인생이라고 철석같이 믿으며 허깨비 삶을 살아간다. 여기 조르바식 삶과 극적으로 대비되는 또 하나의 삶이 있어 독자에게 소개한다.


영화 ‘오픈 유어 아이즈’에 나오는 주인공의 삶이다.


부유한 미남에 아름다운 애인까지 생긴 청년에게 끔찍한 불행이 닥친다. 청년은 처참한 교통사고의 후유증으로 흉측한 몰골로 변했건만 현실을 인정하지 않는다. 현실을 거부한 채, 자신의 실체를 직시하는 용기 대신 허구의 인생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조르바식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너무나 친숙해서 오히려 낯선 내면의 자아와 친해지기, 병든 혈관에 자연의 생명력을 수혈하기, 간절히 원한다면 뜸들이지 않고 즉각 행동하기.


이것이 바로 조르바형 인간으로 변신하는 비결이다.


이명옥 사비나미술관장·국민대 겸임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