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지구촌 강원인] 우석근 (사우디아라비아/강릉) / 법9회

건국초기 정보 전문가… 사업가로 중동지역 누벼



 우석근(禹石根 ·76)씨는 강릉출신 사업가다.
 나이에 비해 정정한 이 노인은 사우디아라비아 수도 리야드에 거주한다. 금년이 어느덧 26년째가 됐다. 그런데 그에겐 세상에 알리자하는 한 가지 일이 남아있다. 한(恨)처럼 가슴속에 맺혀 있는 과제다. 마음 한구석에 이를 담아놓고 오랜 세월을 보내왔다.
 이는 다름 아니다. 이승만 정권 실각 후의 비화(秘話)다. 반세기가 훌쩍 가버린 세월. 당시 정치현장에 서있던 그는 그때 내막을 잘 파악하고 있는 몇 안 되는 생존인물이다.
 얼핏 보면 그는 평범한 비즈니스맨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가 대한민국 건국 초창기부터 정보 전문가로 한때 명성을 떨친 사나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몇 되지 않는다. 이승만 정권과 운명을 같이 했으며, 5·16 박정희 군사정부 땐 중앙정보부 창설을 위해 활약한 제1기 중정 요원(要員)이었다.


51년 경무대 경호실 근무 시작… 15년간 중앙공무원 생활


 우석근 경무대(청와대 전신) 경호실 요원(경사).

 그는 오늘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바른 역사규명을 위해 고민한다. 핵심요점은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 건이다. 정설로 굳어져있는 이 ‘하와이 망명’건은 결코 사실이 아니라는 것이다. 진실은 ‘망명 아닌 추방’ 이었다는 것이 그의 절대적 주장이다.
 망명이든 추방이든 후세대에게 어느 정도 의미를 줄 것인가. 이 대통령을 존중하는 입장에선 차라리 망명으로 미화(?)돼 있는 현실이 더 나을지 모른다. 단지 역사적 진실이 밝혀져야 한다는 데 이의를 달수는 없지만.
 우석근씨 부부는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 가족(영부인 프란체스카)과 자유당시절이 끝난 시기까지 함께 보냈다. 이 때문에 경무대(청와대 전신)와 이화장(梨花莊) 집안일을 14년간 마지막까지 돌봐 온 부인 방재옥(方在玉·74)씨는 이승만시대의 유일한 산 증인으로 꼽힌다.
 우석근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한인회장.
 그는 1929년 강릉 옥계면 산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일제 시 토목사업으로 목재소와 정미소 등을 경영한 기업가였다. 그는 8남매 중 장남으로 유복한 환경아래 옥계초교를 나와 강릉농공고를 다녔다.
 해방 이듬해인 만17세가 되는 46년부터는 서울에서 살았다. 학업은 경기공업학교를 졸업하고 경성대(서울대 전신) 법대에 입학했다. 그러나 경비대(軍)에 편입하면서 간부후보생으로 국민대 법학과를 졸업한다.
 “51년부터 경무대(前 청와대)에 들어가 쭉 경호실 간부로 있었어요. 그러다 4·19가 터지고 그 뒤 5·16 박정희 군사정부 시기인 1966년까지 15년간을 중앙공무원(정보요원)으로 근무했지요. 중앙정보부 초창기 멤버였습니다.”
 그가 경무대에 근무할 때 역시 경무대 내부 살림살이를 도맡았던 두 살 아래인 부인 방재옥 씨와 중매로 맺어졌다. 만24세 때였다. 부인 방씨는 대통령 사가인 이화장 뒷집에 오래전부터 살았다고 한다. 그때의 인연으로 경무대와 이화장 양쪽에서 이승만 정권의 마감 순간까지 10여년 세월을 같은 배에서 보내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는 66년 베트남으로 갔다. 월남전이 한창인 시절이다. 그는 그곳에서 민간인 신분으로 7년간을 베트남에서 활동했다. 그가 베트남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고개를 저으니 알 수 없다. 아마 정보전문가이니 그 계통 일에 종사했을 것으로 추측할 뿐. 73년에 그는 라오스로 갔다.
 “그때 나이가 이미 44살 이었죠. 라오스에 한국대사관이 처음 세워져 창설요원으로 선발됐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라오스에서 일하던 중 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하면서 그해 7월 라오스대사관도 곧 철수하고 말았지요.”
 이는 당시 동남아 지역이 공산화로 급변함에 따른 조치였다. 캄보디아, 라오스 등이 베트남과 더불어 공산화되고 있었다. 그때를 마지막으로 그는 9년여 기간 해외공관 생활을 완전 청산하게 됐다고 한다.


66년부터 베트남·라오스 등 전전… 80년 사우디 정착 사업




 그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약5년 간 이란, 그리스, 튀니지와 리비아 등지를 전전하며 해외 사업 일에 정열을 쏟았다. 그러다가 50이 넘는 나이에 정착한 땅이 회교국 사우디아라비아.
 80년에 사우디에 닿아 26년 동안 상주하며 그 땅에 굳건한 사업 뿌리를 내렸다. 동원개발주식회사라는 이란 현지법인체를 설립하고 대표직함으로 비즈니스를 일궜다. 가족도 사우디로 데려왔다. 그러나 사우디는 영주권을 허용 않는 나라다. 이 때문에 2년마다 체류비자를 연장해가며 계속 살고 있다.
 “이 나라는 개인으로 사업을 못 합니다. 제 경우는 노동허가가 있으니 생활에는 아무 문제가 없어요. 회사 일은 토목공사와 발전소, 변전소, 고압송전선로 등 전기공사 등을 맡아 하고 있지요. 아무튼 벌써 해외생활만 어언 40년이 됐습니다.”
 그는 사우디 비즈니스는 사업대로 힘쓰며 지구촌을 누빈다. 한국으로 갔다가 곧 아시아국에 들른다. 또 중동, 아프리카, 미국 등지로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청년이상의 강인한 체력을 지닌 어찌 보면 신비스런 인물이다.
 더구나 사우디는 ‘라마단’이라는 10월부터 한 달간은 금식기간이 있다. 이 때는 다른 나라에 머물며 그 역시 안식을 취한다. 사우디의 까다로운 환경 때문에 미국 필라델피아에도 거주지를 마련했다. 미국 영주권도 갖고 있어 그야말로 동(東)에 번쩍, 서(西)에 번쩍인다. 슬하에 남매를 두었으며 딸은 LA에 살고 있고 아들은 필리핀에서 사업을 하고 있는 그야말로 지구촌 가족이다.
 한편 우사장이 중동지역의 터줏대감이니 맡고 있는 직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뿐이 아니라 중부지역 한인회장도 겸직하고 있다. 그뿐이 아니다. 중동-아프리카지역 한인회 연합회장, 민주 평통 구주 남부(南部), 아프리카, 중동지구 협의회 지회장, 한국지방자치단체 국제화 재단 중동주재 위원 등 열거하기에도 바쁘다.
 고향으로부터는 수년전부터 강원도 국제명예협력 관과 강릉시 명예협력관으로 임명받았다. 이 많은 감투로 인한 잦은 회의 때문에 그는 여러 지역을 다녀야 한다. 또 통일문제에 관심을 가져 오래전부터 ‘한반도 통일연구회'에 가입돼 있다. 주로 재력이 있는 해외동포들로 구성된 이 기구(본부 독일)는 매년 1회 해외에서 통일세미나를 갖는다.
 남북관계 통일문제에 의견을 나누며 그는 기자에게 미래 계획을 들려줬다. 그러나 이승만 얘기로 화제가 바뀌면서 마음이 편치 않은 얼굴이다. 아직도 무언가 꺼림직 한 게 있나 보다.
 “언젠가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왜곡된 부분을 바로 잡겠어요. 늦었지만 자료를 모으고 이 대통령에 대한 글을 쓸 계획이에요. 아직 4·19주축세대 때문에 좀더 시간을 보고 있지만 준비는 해야지요. 반드시 역사는 바로 밝혀질 것입니다.”
khsong@kado.net


기사입력일 : 2005-10-18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