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제국주의로 치달은 일본의 반쪽 민주주의 / 한상일 (정외)교수

비록 1945년 이전의 일본역사가 군국주의와 주권상실로 그 막을 내리기는 했지만, 그 속에서 일본은 민주주의를 실천한 역사적 경험을 지니고 있다. 그 것이 짧은 기간이기는 했지만 한 때 일본은 구미 선진국에 뒤지지 않는 보통선거, 선거에 의한 정권교체, 정당을 중심으로 한 의회정치를 완숙하게 실천했다.

요시노 사쿠조(吉野作造·1878~1933)는 오늘날 ‘다이쇼(大正) 데모크라시’로 알려진 전전(戰前) 일본의 의회정치 성립에 이념과 틀을 제공한 선구적 인물이다. 메이지(明治) 융성기에 태어나 성장한 요시노는 센다이(仙台)일중-도쿄대학을 거치는 동안 늘 수석의 자리를 지켰다. 고등학교 시절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그는 평생 기독교적 윤리와 인본주의에 철저한 신앙인으로서 살았다. 대학시절에는 당시 종교계와 지식인 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 월간지 ‘신진(新人)’ 창간에 참여하여 오랫동안 편집을 주도했다. 대학졸업 후 당시 중국의 실권자인 위안스카이(袁世凱) 아들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어 중국에 3년 동안 체류하면서 격변하는 중국을 체험했고, 이는 그로 하여금 뒷날 중국혁명에 관한 많은 업적을 남기게 했다. 중국생활을 끝내고 귀국한 그는 약관 32세에 도쿄제국대학 법학부 조교수로 정치사를 강의했다. 다시 3년의 구미유학을 끝내고 귀국, 1914년 교수로 부임하면서부터 정력적으로 ‘민본주의’ 이론을 펼쳐나갔다. 요시노 사후 출간된 ‘민본주의론’은 그의 대표적 저서다.

서구민주주의 발전과정과 정치사를 연구한 요시노는 제1차 세계대전과 함께 나타난 민중의 등장이라는 세계사적 조류를 보면서 민중의 정치적 영향력이 힘으로 억압할 수 없는 대세로 변하고 있음을 간파할 수 있었다. 그는 일본의 정치적 ‘신경향’도 원로의 정치적 세력이 쇠락하고 대신 민중이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음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이런 시대흐름과 함께 요시노는 민본주의(民本主義)라는 이론을 제시하여 법리상 주권은 천황에게 있다는 메이지 헌법의 절대성을 인정하면서, 번벌(藩閥)·관료에 의한 과두체제를 타파하고 정당정치와 보통선거를 바탕으로 한 의회민주주의가 가능한 길을 모색했다. 이런 민본주의론은 천황주권론을 피해가기 위한 하나의 방편으로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있다는 비판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다이쇼기 국민의 정치참여확대, 보통선거제의 실현, 대의정치의 개량, 정당내각의 발달 등 민주주의를 현실적으로 가능케 한 정치개혁을 촉진시킨 원동력으로 작동했다.

그러나 요시노의 민본주의는 국내정치에 국한했을 뿐, 밖으로는 팽창주의라는 일본제국이 안고 있는 본질적 한계를 뛰어 넘지는 못했다. 국내정치에 있어서 민중의 존재를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정치참여를 강조하면서도, 식민지 또는 반식민지 체제하에 있었던 조선과 중국의 민중과 그들의 권리와 주권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그는 일찍부터 조선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일본의 식민정책을 비판했다. 특히 3·1독립운동 이후에는 합병 후 일본이 실시해 온 식민정책은 ‘악정(惡政)’이라고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비판은 조선지배의 본질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당국의 세련되지 못한 지배의 ‘기술’과 시대에 뒤진 ‘정책’이었을 뿐이다. 그도 조선인의 최종요구가 민족자결의 원칙에 의한 자주독립에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요시노 역시 ‘안으로는 민주주의’, ‘밖으로는 제국주의’라는 틀에서 벗어나지 못했고, 이러한 경향은 결국 다이쇼 민주주의가 그 후 등장한 군국주의를 극복하지 못하게 한 원인이기도 하다.

민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전전(戰前)의 민주주의 경험은 전후 민주주의가 시행착오 없이 정착할 수 있는 토대가 됐다. 그러나 오늘 일본의 민주주의가 보다 튼튼한 기틀을 다지기 위해서는 민본주의가 안고 있던 ‘밖으로 제국주의’라는 한계를 극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원문보기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8/04/2007080400007.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