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극심한 경쟁에 ‘번아웃’… 한국 여자선수 은퇴 빠르다 / 최우열(스포츠교육학과) 겸임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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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선수 ‘조로 현상’
美 잉크스터 61세에도 현역 장기간 심신 피로로 의욕 잃고
얼마 전 끝난 미국여자프로골프(LPGA) 볼런티어스 오브 아메리카 클래식에서 이미 5년 전에 은퇴한 한국의 박세리와 동갑인 44세 노장 골퍼 미국의 앤절라 스탠퍼드가 우승을 차지했다. 대학을 마치느라 데뷔는 박세리보다 4년 늦었던 스탠퍼드지만, 우승까지 하며 21년째 현역 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비단 스탠퍼드뿐 아니라 LPGA에는 많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현역으로 활약 중인 골퍼가 많다. 현재 LPGA 최고령은 미국의 줄리 잉크스터로 61세다. 영국의 로라 데이비스는 58세, 스코틀랜드의 카트리나 매슈는 52세, 박세리의 라이벌이었던 호주의 캐리 웹은 47세, 그리고 1997년 박세리와 퀄리파잉(Q) 스쿨을 공동 1위로 통과했던 크리스티 커는 44세다.
반면 LPGA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국 선수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선수는 1986년생으로 올해 35세인 지은희다. 국내 투어에서는 홍진주가 38세로 현역 최고령이다. 이처럼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은 대체로 이른 나이에 은퇴하거나 현역 활동 기간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 비교해 짧은 편이다. 지난해 투어에서 은퇴한 허윤경과 김지현2의 나이도 각각 30세와 29세였다.
한국 여자 골프선수들에게 만연한 조로 현상은 어린 시절부터 장기간에 걸쳐 극심한 경쟁과 스트레스에 지속해서 노출된 결과다. 스트레스가 적절히 해소되지 못하고 장기화하면, 마치 지나치게 세게 당겨진 스프링이 탄성을 잃어버려 늘어지는 이른바, ‘번아웃 증후군’이라고 부르는 소진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즉, 극도의 신체적, 정신적 무력감과 피로감을 느끼며 집중력이 저하되고 의욕과 동기가 상실되면서 무엇을 해도 즐겁지 않고 매사에 부정적이고 냉소적으로 변한다. 경기력마저 저하되면서 마침내 은퇴를 결심하게 되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골프를 시작해 집중적으로 훈련하는 초전문화(hyperspecialization)도 조로 현상을 가속화하는 요인이다.
골프계에서는 두 살에 골프를 시작해 최고에 오른 타이거 우즈의 영향으로 일찍 골프를 시작해 집중하는 것이 성공의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 종목에만 집중하는 것이 반드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인간의 발달과정에는 일정 시기에 적절한 자극과 환경이 제공됐을 때만 특정 능력이나 기능이 발현되는 이른바 ‘결정적 시기’란 것이 있다. 예를 들어 언어의 경우 9∼11세 이전까지 특정 언어를 습득해야 모국어 수준의 구사가 가능하다. 이 시기가 지나면 해당 능력이 사라지거나 개발이 훨씬 어려워진다.
마찬가지로 지나치게 어린 시기에 특정 종목에 전문화할 경우, 결정적 시기가 아니면 결코 개발될 수 없는 특정 근육이나 신체 기능의 발달을 저해할 수 있다. 불균형한 신체 발달은 장기적으로는 실력 향상이 정체되는 ‘속도 정체’ 현상으로 이어질 수 있다. 또 한 종목만 계속 훈련하면 흥미가 떨어지고 특정 신체 부위의 반복 사용으로 부상에 시달리게 된다. 우즈만 해도 선수 생활 중 무려 25차례의 크고 작은 부상으로 투어를 쉬어야 했다.
스포츠 과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우즈의 성공은 오히려 예외적인 사례에 가깝다. 통념과 달리 최고의 운동선수들은 0∼15세 동안 훗날 자신이 활약할 종목에 쏟은 시간이 다른 선수들과 비교해 오히려 적었다. 테니스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꼽히는 로저 페더러는 어릴 때 스키, 배드민턴, 야구, 축구 등 다양한 종목을 하다가 또래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테니스 선수가 됐다. 통산 72승의 골프여제 애니카 소렌스탐은 골프를 시작하기 전, 어릴 때 스키, 축구, 테니스 종목에서 선수 생활을 했다.
메이저 최다승의 잭 니클라우스도 고등학교 때까지 골프와 함께 야구, 농구, 미식축구, 테니스 등 다양한 스포츠를 즐기거나 선수로 활약했다.
국민대 골프과학산업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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