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학교

언론속의 국민
진정한 혁신, 경계 넘어서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 김재준(국제통상학과) 교수

창조는 섞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극적으로 실현된 도시가 서울이다. 광화문광장에 서면 북쪽으로는 경복궁과 북악산이 만든 역사와 자연 풍경이, 남쪽으로는 현대 고층 빌딩이 만든 스카이라인이 펼쳐진다. 두 이질적 풍경이 만나 섞이는 순간 서울만의 독특한 정체성이 태어난다.

 

21세기 창조성의 핵심은 ‘섞기’

 

독일 베를린 한 건물. 과거 구조를 두고 겹쳐 짓는 방식으로 디자인한 덕분에 스타일 믹스가 드러난다. [김재준 제공]
 

 

서울은 사실상 세계에서 가장 힙한 도시가 됐다. BTS 음악, 봉준호 영화, ‘흑백요리사’ 음식, 젠틀몬스터 디자인이 만든 새로운 문화적 결이 세계인의 시선을 사로잡고 있다. 홍대 앞과 이태원, 성수, 을지로에서는 매일 새로운 실험이 이뤄진다. 세계적 명품 브랜드 루이비통과 샤넬도 서울에서 영감을 찾을 정도다.



정작 서울에 사는 한국인은 서울의 매력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더 나아가 기존 도시 평가 지표 역시 서울의 매력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 국내총생산(GDP)이나 물가 수준, 교통체증, 대기오염 같은 전통 지표로는 서울의 문화적 역동성을 설명할 수 없다. 새로운 형태의 ‘도시매력도지수’가 필요한 이유다. 도시에 거주하는 인플루언서의 팔로어 수, 소매치기 공포지수 등을 반영하는 새 지표를 개발해야 한다.


‘섞기’는 21세기 창조성에서 핵심 코드다.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테크놀로지와 리버럴 아트의 교차점”이라고 한 말은 단순히 수사가 아니다. 실리콘밸리 엔지니어링에 인문학적 상상력을 더한 잡스의 시도는 인류 삶을 근본적으로 바꿨다. 그 결과물인 아이폰 역시 예술, 디자인, 인간공학, 심리학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문화적 산물이다.


패션계에서 믹스(mix)는 더욱 과감하게 이뤄진다. 특히 루이비통과 슈프림의 컬래버레이션은 업계에 충격을 줬다. 160년 전통 럭셔리 브랜드와 스케이트보드 문화에서 시작된 스트리트 브랜드의 만남이 명품과 대중의 경계를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이는 오늘날 문화적 지형의 변화를 반영한다. 실제로 하이엔드(high end)와 스트리트(street)의 구분은 점차 무의미해지고 있다.



음식 영역은 더욱 흥미롭다. ‘치맥’은 미국 프라이드치킨에 한국식 양념과 맥주 문화를 더한 한국만의 음식 문화다. 지금도 발효 식재료와 프렌치 조리법의 만남, 전통 장과 이탤리언 파스타의 결합, 김치와 타코의 퓨전 등 경계를 넘나드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외국 셰프들이 서울에 레스토랑을 내는 경우도 증가 추세다.


예술은 가장 최전선에 있다. 비디오아트 창시자 백남준은 전자기술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었고, 팝아트 선구자 앤디 워홀은 대중문화와 순수미술의 경계를 무너뜨렸다. K팝 역시 힙합, R&B, 일렉트로닉 등 다양한 장르에 한국적 감성을 섞어 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디지털 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다차원적으로 이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메타버스는 현실과 가상의 경계를 넘나든다. 디지털아트와 블록체인 기술의 만남은 예술 작품 소유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고 있다. 픽셀로 만든 그림이 수백억 원에 거래되는 시대다. 더 나아가 인공지능(AI) 아트는 다른 차원의 실험을 가능케 한다. 알고리즘이 렘브란트 판레인을 학습해 초상화를 그리고, 챗GPT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체로 시를 짓는 시대다.

 

‘채식주의자’로 상상 실험하기


최근 독일 사진에 빠진 필자는 한 가지 ‘상상 실험’을 하고 있다. 한강의 소설 ‘채식주의자’와 독일 사진작가 3명이 만나는 순간을 머릿속에 그려본 것이다. 대형 사진 작품과 한강의 문장을 함께 보여주는 식이다.



첫째, 토마스 루프의 ‘초상(Portrait)’ 시리즈는 마치 CC(폐쇄회로)TV로 포착한 것 같은 냉정한 시선이 특징이다. 이는 ‘채식주의자’ 초반부 영혜를 관찰하는 남편의 시선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평범한 얼굴이었다. 특별히 예쁘지도 않고 특별히 못생기지도 않은”이라는 구절은 루프의 작품이 나타낸 비개성적 인상과 공명한다. 이는 균열되기 시작하는 일상성의 표면도 암시한다.


둘째, 볼프강 틸만스의 ‘자유 유영(Freischwimmer)’ 시리즈와 ‘채식주의자’ 속 몽고반점의 만남이다. 틸만스는 카메라 없이 이 작품을 만들었다. 감광지를 빛에 노출시켜 마치 물속에서 부유하는 듯한 신비로운 형태를 만들어낸 것이다. 푸른빛과 검은빛이 서서히 번지고 섞이면서 나타난 이 이미지는 소설 속 “푸른빛이 도는 검은 몽고반점들이 등을 덮고 있었다. 마치 검은 꽃잎들처럼”이라는 구절과 시각적 공명을 이룬다. 현실의 비극이 예술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셋째, 카를 블로스펠트의 식물 사진은 오래된 작품임에도 현대적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 블로스펠트는 1920년대 대형 카메라로 식물을 찍었는데, 그의 사진은 과학적 정확성과 예술적 승화를 동시에 이뤘다. 그의 식물 확대 사진은 “나는 나무가 되고 싶어. 두 팔을 하늘로 뻗고, 온몸에 초록빛 물이 들어가고 있어”라는 영혜의 소망에 구체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듯하다.



서로 다른 시공간의 예술이 만나면 무한한 의미 확장이 발생할 수 있다. 문학과 사진, 동양과 서양, 서사와 이미지라는 이질적 요소의 만남은 각각의 예술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게 한다. 상상 실험은 이것을 가능케 하는 창의성 증진 기법 중 하나다.


창조는 익숙한 것을 낯설게 보거나, 낯선 조합을 상상할 때 시작된다. 설령 그것이 실현되지 않더라도 시도하는 것 자체만으로 새로운 가능성이 열릴 수 있다. 진정한 혁신은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에서 시작된다. 이것이 우리 시대가 필요로 하는 창조성의 본질이다.

 

김재준 교수는…
서울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국민대 경상대학장, 국민대 도서관장과 박물관장, 한국예술경영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국민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