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청 폐지, 권력범죄자만 살판난다[시평] / 이호선(법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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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선 국민대 법대 학장
나치 暴政도 법치 붕괴에서 시작
12년 전 이탈리아 피렌체의 유럽연합대학원(EUI)에서 방문교수로 머무는 동안, 인상 깊은 장면 하나를 목격했다. 유럽연합(EU)이 주관한 사법연수 프로그램에서 폴란드·헝가리·체코 등 과거 사회주의 체제에 속했던 회원국 출신 판사들이 ‘법치주의’를 새롭게 배우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국가는 EU에 가입한 이후 이미 10여 년이 지났고, 가입하기 전부터 ‘EU 법률 체계’(Acquis communautaire)를 수용하면서 국내법 체제를 유럽 수준으로 정비해 왔다. 사법부의 독립, 판·검사 임용의 투명성과 공정성, 신분 보장 등 제도적 요건도 나름대로 EU 기준에 맞추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들은 여전히 재판의 방식, 시민을 대하는 태도, 법의 독립성과 절차의 의미를 익히는 중이었다. 그 장면은 필자에게 중요한 사실 하나를 각인시켜 줬다. 법치주의란 단지 법을 제정하고 판례를 학습하는 기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전체주의 체제에서는 법이 권력의 도구에 불과하고, 수사와 재판은 체제 유지를 위한 수단이며 대외적 기만과 선동의 방편에 지나지 않는다. 전체주의가 아니더라도 다수의 폭압이 일상화한 사회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은 이러한 교훈을 역사적 고통을 통해 체득해 왔다. 나치의 폭정과 공산 정권의 억압은 모두 법치 붕괴에서 시작됐다. 그래서 유럽은 법치주의를 인간의 존엄·포용성·비차별성 등 여러 가치 중 하나로 끼워 넣지 않는다. 이 모든 가치를 하나로 묶어 ‘가치들과 법치주의’(values and rule of law)로 나란히 자리매김한다. 자유·평등·포용·다양성은 법치라는 기반이 튼튼할 때만 비로소 실현 가능한 이상이다. 법치 없는 평등은 선동이고, 법치 없는 포용은 무원칙에 불과하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은 법치주의의 퇴장 위기에 직면해 있다. 여당이 과거 야당 시절부터 추진해 온 이른바 ‘검찰개혁 4법’(검찰청 폐지, 공소청 설치, 국가수사위원회 설치, 중대범죄수사청 설치)은 범죄 수사에 대한 국가의 대응 능력을 떨어뜨리는 자해적 조치이자, 법치주의의 근간을 뒤흔들 우려가 크다.
이대로 간다면, 사건은 있어도 범죄는 없고 피해자는 있어도 가해자는 없는, 반사회적 성향을 가진 이들만 살판나는 나라가 될지 모른다. 정치인이나 권력자의 범죄는 국가수사위원회라는 이름 아래 흐지부지되고, 대신 말단 피의자 몇 명을 잡아 기강을 세우는 시늉으로 대중을 속이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일반 국민도 사건을 담당하는 경찰과 연결된 인맥을 찾는 데 급급할 것이다.
현재 추진되는 검찰청 해체 시도와 수사 기능의 제도적 와해, 경찰 단계에서 사건을 종결하고 이의제기 기회를 사실상 차단하는 일련의 조치는 단순한 권한 조정이 아니라 법치 해체 시도에 가깝다. 여기에 이재명 대통령 개인의 형사재판을 지연 또는 회피하려는 법제도의 악용과 사법부의 굴종적 태도는 특정인을 위한 방탄을 넘어서, 국민 전체가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칙을 파괴하는 매우 위험한 선례를 남기고 있다.
법은 국민 모두에게 마지막으로 남는 보호막이다. 그 보호막에 단 한 사람을 위한 구멍이 생긴다면, 내일은 누구나 법의 보호에서 배제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더 심각한 문제는 따로 있다. 바로 대중의 윤리적 감각이 무뎌지는 것이다. 국민의 속성이 타락하는 것이다. 법이 무너지면 사람들은 정의보다 권력의 향방에 민감해지고, 옳고 그름보다 유불리를 따지며, 정당성보다 편의성을 좇는다.
부패한 토양 위에 건강한 시민 공동체가 설 수 없다. 법치주의가 퇴색한다는 것은 개인의 도덕의식 해체와 공동체 전체의 무기력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냉소와 무관심, 정치 혐오, 도덕적 무감각은 단순한 피로가 아니라 법치가 무너질 때 공동체 전체가 앓는 중병의 징후일 수 있다. 상식이 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죄를 지은 자는 신속히 수사와 재판을 받고 합당한 처벌을 받아야 하며, 국가는 크고 작은 부패와 불의를 그때그때 척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부와 여당이 국가와 미래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의식을 갖고 있다면, 지금 같이 무모하고 반법치주의적인 행태는 즉각 중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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