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렁증과 자신감 회복 / 이의용(교양학부) 교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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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모임에 갔는데 진행자가 다른 참석자에게 기도를 부탁했다. 한참 침묵이 흐르더니 기도 대신 “장로님이 대신 기도해주시겠습니다”라고 하는 바람에 필자가 대신 기도를 한 적이 있다. 여러 사람 앞에서 기도를 한다는 게 어떤 이에겐 번지점프대에 오를 때만큼이나 두려운 일일 수 있다. 2010년 9월 G20 서울정상회의 폐막식 때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기자회견을 하면서 한국 기자들에게 특별히 우선 질문권을 줬다. 그러나 아무도 선뜻 나서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면담을 해보면 발표 울렁증으로 힘들어 하는 학생이 적지 않다. 고등학교 시절 단 한번도 청중 앞에서 발표를 해보지 않은 학생이 40% 정도 되는 것 같다. 발표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거나, 동료들로부터 ‘나댄다’고 비난을 받아 청중 앞에 나서길 포기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원인은 수직적인 수업 문화에 있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강의가 곧 수업’이라고 믿거나 학생을 자신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교사들이 있다. 그래서 학생들의 입을 막고 자기 혼자 강의만 한다. 그러다보니 강의를 듣는 게 곧 공부라고 믿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 그래서 강의 내용을 녹음하듯 베끼고 책의 내용을 밑줄 쳐가며 외운다. 학생의 학습 주도권 자체가 무시되니 자신감이 생길 리 없다. “50권의 책을 읽기보다 1권의 책을 써보라” “3시간짜리 강의를 듣기보다 3분의 강의를 해보라.” 내가 학생들에게 권하는 주문이다. 말하고 쓸 때 진짜 공부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말하고 쓰려면 자신의 생각이 필요한데, 그걸 위해 다른 사람의 강의도 듣고 책도 읽는 게 공부다. 그러나 수직적인 교육은 학생이 자기 생각을 갖지 못하게 하고 다른 사람의 생각을 주입하려고만 한다. 교육이란 학생 스스로 답을 찾도록 돕는 것이지 교사가 찾은 답을 주입하는 게 아니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끊임없이 제자들에게 물었고 공자는 제자의 질문에 답하며 자기 생각을 찾게 했다. 예수님도 제자들에게 물으시고 니고데모에겐 답하시고 성전에서는 선생들과 토론하셨다. 교사 혼자 강의만 하면 ‘목메달’ 수업, 교사가 학생에게 말을 걸면 ‘동메달’ 수업, 학생이 교사에게 말을 걸면 ‘은메달’ 수업이다. 교사와 학생, 학생과 학생이 서로 묻고 자신의 생각을 말하면 ‘금메달’ 수업이다. 우리 교회 교육의 메달은 과연 어떤 색깔인지 성찰해보자. 발표 울렁증은 부정적 사고에서도 나온다. 그래서 우리 수업에서는 “예”하는 대답 대신 ‘오늘의 굿 뉴스’ 한 줄을 소개하며 출석 대답을 대신한다. 수업 때마다 주고받는 짧은 편지에도, 언제나 열려있는 쌍방향 단체 카톡방에도 칭찬과 격려가 가득하다. 수업 중에도 질책이나 지적 대신 ‘괜찮아’ ‘고마워’ ‘잘했어’ ‘점점 나아지고 있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생각하기 나름이다’ ‘떨지 말고 설레자’ ‘할까 말까 할 때에는 하자’ ‘내 생각이 답이다’ ‘내가 원본이다’ ‘경험이 보약이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보다 중요한 건 내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느냐다’ ‘남과 나를 비교하지 말고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나를 비교하자’라며 서로 응원해준다. 요즘 국민들의 표정이 많이 밝아진 것 같다. 권위주의가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자는 상대방을 자신보다 열등하게 여기고 가르칠 대상으로만 내려다보려 한다. 그래서 상대방과 묻고 답하는 걸 두려워한다. 권위의 상징인 교사나 목회자들이 상대방을 수평적으로 대할 때 서로 말문도 열리고 가르치는 이의 권위도 빛날 것이다. 성육신하신 예수님처럼.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하고 예수님이 다시 묻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하고 대답했다.(마 16:15∼16, 현대인의 성경) 원문보기 : http://news.kmib.co.kr/article/view.asp?arcid=0923764061&code=23111413&cp=nv |